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나라 (문단 편집) === 중당(中唐) === 이후 당나라는 심하게 막장트리를 타게 된다. 바로 절도사의 난립 + [[토번]]의 흥성 때문이다. 당나라는 건국 당시 균전제와 연계한 군사 제도인 [[부병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토지 지급량이 줄어들면서 과중한 군역에 못 이겨 군역을 피해 도망치는 도호화가 진행되었고 이는 당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측천무후, 현종 시기부터 심각한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은 [[번진]]을 설치했다. 이때까지의 번진은 어디까지나 변경 지역에 국한되었는데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내지에도 번진을 설치하는 내지 번진이 설치되었다. 이로서 당제국은 수도 장안 인근 지방 일부와 당을 지지하는 [[강남(중국)|강남]]지방의 번진(순지 번진)을 제외하곤 잠재적인 적들에게 둘러 싸인 형국이 되었다. 절도사들의 군사력은 급속히 강해졌고, 절도사들끼리 서로 결탁하여 중앙 정부로 조세를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중앙 정부의 군사력은 규모와 훈련, 사기 모두에서 최악의 막장 군대가 되는 등 당나라는 총체적인 쇠퇴를 겪게 된다. 특히나 번진은 물론 당 황실에서도 부병제를 대신하여 용병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재정 부담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한때는 절도사들을 진압해서 지방 통치를 반짝 복구해('''원화중흥''') 그럭저럭 120년을 버티지만, 외부적으로는 [[티베트|토번]]과 [[위구르 제국|회흘]]의 강성으로 당은 [[시안(도시)|장안]]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또한 안사의 난에서 위구르는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장안을 침략했는데 이 때 장안 시내가 대단한 피해를 얻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고조 이연의 자손은 남자든 여자들 싸그리 노예로 끌려 가서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받기도 하였고 황폐화된 장안은 한동안 재기 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또 [[요동]]과 [[만주]] 지방은 [[거란]]과 [[발해]]의 세력권이 되었다. 또 고구려 유민 출신인 [[이정기]]의 치청 번진 등은 사실상 반독립 왕국이 되어 손자 [[이사도]]까지 무려 4대를 이었고 결국 당나라는 신라에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다만 [[김웅원]]이 이끄는 3만 신라 지원군이 이사도 토벌전에 참여하기 전에 이사도가 망해서 전투는 없었다.] 국력을 쏟아 간신히 이사도를 토벌했다. 이때 활약한 황제가 두 사람 있는데 바로 ([[숙종(당)|숙종]], [[대종(당)|대종]] 다음인) [[덕종(당)|덕종]]과 ([[순종(당)|순종]] 다음인) [[헌종(당)|헌종]]이다. 덕종은 양세법을 실시하여 재정을 충실히 했고, 당조에 적대적인 하북 3진을 치러 나섰지만 전선이 지지부진했던 사이에 장안에서 주차-이회광의 난이 터지고, 그거 진압한 후에도 토번-회흘과 [[중앙아시아]]를 두고 계속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화해했다. 덕종의 노력은 헌종에게 이어졌다. 특히 헌종 시기가 되면 친위 부대인 신책군이 설치되고 이를 이용해 적대적인 번진을 모두 진압했다. 이에 번진의 재정과 군사력을 회수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등 큰 소득을 거두었다('''원화중흥'''). 그렇지만 헌종은 말년에 --마약-- [[금단]]에 빠지고 [[불교]]를 맹신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환관]]에게 독살당하고 말았다. 다시 당왕조는 막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