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개 (문단 편집) === 왕안석과의 갈등 === 1067년, 영종이 사망하고 영종의 태자 [[신종(송)|신종]]이 즉위하자 당개는 삼사사(三司使)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인 1068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되었다. 당시 신종이 [[왕안석]]을 등용하려고 했고 [[증공량]]이 신종에게 왕안석을 적극적으로 천거하자, 당개는 여기에 반발하였다. 다음은 당개와 신종의 문답이다. >신종: 왕안석의 문학적 재능 때문에 임용할 수 없소? 정사를 처리하는 능력 때문에 임용할 수 없소? 경학 때문에 임용할 수 없소? >당개: 왕안석은 학문을 좋아하지만 낡은 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논의가 실제와 맞지 않을 것이니 만약 왕안석에게 정사를 맡긴다면 틀림없이 많은 것이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왕안석을 천거한 증공량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안석이 정말로 등용된다면 천하가 반드시 혼란해질 것이니 공들은 마땅히 이 점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오. 그리고 중서성에서 임명장을 제출했음에도 신종이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했다. 다음은 당개와 신종의 문답이다. >신종: 마땅히 왕안석에게 자문하겠소. >당개: 폐하께서 왕안석이 중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곧바로 왕안석을 중용했을 텐데 어찌 중서성의 정사를 한림학사(翰林學士)에게 결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소신은 근래에 폐하께서 어떤 사안을 효유하실 때 왕안석에게 자문하여 왕안석이 동의하면 시행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시행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되면 재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대신을 신임하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신들의 재주가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것일테니, 저를 먼저 파면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왕안석이 재상이 되자, 당개는 신종에게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중서성이 공문서를 처리할 때 모두 성지(聖旨)라고 부르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것들이 거의 많으니 마땅히 중서성만 공문서를 내도록 해야 합니다. 신종은 당개의 발언에 놀란 모습을 보였지만 당개는 다시 다음의 발언을 이어갔다. >옛날 [[구준(북송)|구준]]이 공문서를 올리며 풍증을 승진시킨 것이 부당하다고 상주하니 풍증이 비판했고 [[태종(송)|태종황제]]께서는 "전대에는 중서성이 당첩(堂帖)을 이용했고 이에 권신이 이를 틈타 위복을 행사하였소. [[태조(송)|태조황제]]께서는 당시 당첩이 칙명보다 비중이 큰 것을 보고 결국 권한을 없앴소. 지금 다시 공문서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당첩과 무엇이 다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계(張洎)가 "공문서를 폐기한다면 중서성이 공문서를 처리할 때 참고할만한 격식이 없어집니다."라고 대답하니 태종황제께서는 "긴요한 사무라면 황제가 직접 칙령을 내리고 공문서를 사용해야 할 일이라도 역시 모름지기 결재를 상주해야 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성지(聖旨)로 칭한 것입니다. 만약 왕안석의 말과 같다면 이것은 정치가 천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설사 재상이 모두 충성스럽고 어질더라도 오히려 제 마음대로 명령을 내린 것이니, 충성스럽고 유능하지 않다면 어찌 나라를 해치지 않겠습니까? 신종은 당개의 말을 받아들여 결국 그만두었다. 당개는 이때부터 수차례 왕안석과 쟁론을 벌였으며, 왕안석이 강변할 때 신종은 왕안석을 두둔했다. 당개는 분을 견디지 못하고 등에 등창이 났다. 병이 심해지자 신종이 직접 문안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결국 1069년 사망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하고 질숙(質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신종은 당개를 조문할 때 황궁의 초상화를 꺼내 당개의 집안에 하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