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개 (문단 편집) === 재상을 탄핵하다 === 당개는 뒤에 입조하여 감찰어사이행(監察御史裏行)이 되었고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전임되었다. 당시 계성원(啓聖院)에서 용봉차(龍鳳車)를 만들 때 궁중에서 진귀한 보석을 내어 용봉차를 장식했는데, 당개는 여기에 대해 다음의 간언을 올렸다. >이곳은 [[태종(송)|태종황제]]의 어진이 봉안된 곳이니 이곳에서 떠들며 모독할 수 없으며, 후궁의 진기하고 사치스러운 도구도 법도를 초과해선 안 됩니다. 당개의 간언을 들은 인종은 재빨리 용봉차를 헐도록 지시하였다. 온성황후의 백부 장요좌가 선휘사(宣徽使), 절도사, 경령궁사(景靈宮使), 군목사(群牧使)를 한꺼번에 맡게 되자, 당개는 [[포증]], 오규와 함께 여기에 대해 간언했고 왕거정에게 관료들을 소집하여 논의하도록 요청하여 결국 장요좌는 선휘사와 경령궁사만 받았다. 하지만 장요좌가 선휘사, 지하양(知河陽)으로 제수되자, 당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폐하께서 장요좌에게 선휘사를 제수하시려고 지하양을 명목으로 하셨으니 여기서 그만둘 수 없소. 당시 당개의 동료들이 불확실한 태도를 보여서 결국 당개 홀로 직언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자 인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명문서는 본래 중서성에서 나온 것이오. 당개는 결국 당시 재상인 문언박을 탄핵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언박은 촉(蜀)을 수비할 때 금을 장식한 기묘한 비단을 몰래 만들어 환관과 결탁하고 황궁과 내통하여 재상의 지위를 얻으려고 했는데, 지금 장요좌를 중용하여 더욱 자신의 지위를 굳히려고 합니다. 문언박을 파면하고 부필을 재상으로 삼으십시오. 당개의 발언에 분노한 인종은 당개의 상주문을 쳐다도보지 않았고 먼 곳으로 유배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당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신은 충의에 고무되어 비록 극형을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찌 유배라고 사양하겠습니까? 인종은 급하게 관리들을 불러 당개의 상주문을 보여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개가 의견을 표명하고 논하는 것은 그의 직책이오. 문언박이 비빈을 통해 재상의 자리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당개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소? 재상을 임용하는데 어떻게 비빈이 관여해야 하오? 당시 문언박도 어전에 있었는데, 당개는 문언박을 보고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문언박은 마땅히 스스로 반성해야 하며, 설령 이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숨길 수 없습니다. 인종은 당시 몹시 아끼던 재상 문언박이 탄핵당하자 분노가 점점 심해져 당개에게 궐에서 물러나라고 압박했고 당개는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1051년 당개는 춘주별가(春州別駕)로 좌천되었지만 왕거정이 당개에게 내린 처벌이 너무 무겁다고 이야기하여, 인종은 결국 당개를 영주(英州)[* 現 [[광둥성]] [[칭위안시]].]로 전근시켰고 또한 당개가 혹여 도중에 죽어서 자신이 강직한 대신을 죽였다는 오명을 얻지 않을까 염려하여 내시에게 당개를 호송하도록 명했다. 문언박은 재상에서 파면되었으며, 당개는 이로 인해 자신의 강직한 성품이 알려져 매요신과 이사중이 모두 시를 지어 당개를 찬미했으며, 송나라의 선비들은 진정한 어사를 논할 때 당개를 거론하며 당자방(唐子方)으로 부르고 찬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