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군제 (문단 편집) ==== 기미지배체제의 약화 ==== 당 전기의 군제가 붕괴된 것은 부병제의 파탄 뿐만 아니라 기미부주를 통한 기미지배체제가 약화된 것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부병제의 파탄이 당의 내부 사회적 변화에 따른 것이라면 기미지배체제는 당의 외부 상황 변화에 따른 것이다. 당 전기의 기미지배체제는 기존의 부족연맹체를 각각의 부족들로 잘게 나누고, 각 부족의 주요 유력자 가문을 친당적으로 유지하면서 기미주로 편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체제를 유지하는 근간에는 당의 강력한 군사적 힘이 있었고, 부족별로 나누어 이이제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관리 정책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당의 기미지배는 '''부족연맹체는 파괴했으되, 부족 내적인 사회구조는 좀 더 집권적으로 만드는''' 작용을 하게 된 것. 즉, 당이 부족과 당나라 사이의 '연결고리로 선택한 유력자들이 그 부족을 좀 더 강하게 지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들이 당에게서 등을 돌리면', '그리고 서로 연합하여 다시 부족 연맹체를 구축한다', 이는 '''좀 더 부족원들을 강하게 지배하고 동원할 수 있는, 통합된 대규모 연맹집단'''의 등장이 된다. 따라서 당은 이들 유력자들을 후대하고, 동시에 당의 군사력을 계속 과시하여 이들이 친당적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야 했다. 수나라처럼 풍부한 물자와 압도적인 물량의 대군을 운용할 능력이 안되었던 당은 인상적인 군사적 성과를 올리고 이를 과시하여 이민족들에게 경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는 당태종 후반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원거리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당의 군사력에 한계가 엿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의 위험신호는 [[토번]]이 토욕혼, 당향족을 복속시킨 사건이다. 토욕혼과 당향족은 당이 서역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기미지배체제 하에 존재하던 유력한 민족들로, 당은 이들의 보호국에 가까운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토번이 무력으로 이들을 복속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당은 외교적 우위를 점하는 선에서 화친을 맺었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에 당은 고창국으로 20만에 달하는 원정군을 보냈기에 군사 활동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주변의 이민족들은 당의 국력의 한계와 특정 지역으로 당이 장거리 원정을 나갈 경우 여타 지역에는 군사력 공백 상태가 일어남을 일깨워 주었다. 종합하자면 당이 한 놈을 신나게 패고 있을 때는 동시에 다른 녀석을 손볼 여유가 없으므로 기회만 잘 노린다면 당의 통제를 벗어나 광범위한 약탈과 영역 확장, 연맹집단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이는 곧바로 이어진 [[고구려-당 전쟁]] 당시 이민족들의 군사 활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태종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친정을 한 1차 고구려 원정 , 당고종 때의 2차 고구려 원정 당시 설연타, 철륵이 바로 반기를 든 것은 우연만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토번의 [[가르친링]]에 의한 안서 4진의 함락과 거듭된 패전, 화전양면전술과 장기전을 시도한 신라의 승리로 끝난 [[나당전쟁]]은 본격적인 기미지배체제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는 부병제가 위기에 처한 시기와 일치하는데, 즉 당의 국력이 상승함에 따라 동원력은 증가하였으되 균전제가 약화되면서 당의 군사력의 두 축, 부병제와 기미부주 중 하나인 부병제 하의 동원 병력의 질적 저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부병제가 약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군대의 질이 떨어지고, 기미지배체제 하의 이민족들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나타나자 '''이민족들은 당의 군사력 약화를 틈타 독립을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다 부병제의 질적 저하는 군령과 군정의 분리로 인한 비효율을 심화시켰고, 당 건국시의 명장들(당태종 본인과 이정, 장손무기, 설민철 등)이 정치적 문제 및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진 후 비효율과 군대의 질적 저하를 극복할 능력이 부족한 장수들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설인귀]], [[소정방]], 배행겸 등 당고종 시기의 유능한 장성들, 그리고 [[이세적]]과 [[글필하력]] 등 당 건국기의 [[명장]]들 중 오랫동안 살아있었던 몇몇이 부지런히 노력했던 [[고종(당)|당고종]] 초창기 치세에는 서돌궐 평정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후기에는 '''패배가 많아졌고, 군사력 저하가 외부에 노출되었다.''' 결국 [[고종(당)|당고종]] 사망(682년) 직전인 681년, 일테리쉬 카간에 의해 돌궐 제2제국이 성립되면서 광범위한 이민족 통제 체제는 최종적으로 붕괴한다. 기미지배체제의 본격적인 성립이 돌궐향호의 귀부에서부터였다는 데서 알 수 있듯 '''기미지배의 근본은 돌궐로 대표되는 북방 이민족에 대한 통제체제였는데 그것을 상실한 것이다.''' 일테리쉬 카간은 이후 하북을 부지런히 공략했고, 이는 그 동생인 카파간 카간(묵철 가한)에게 이어져 스텝 초원지대 유목민족을 대부분 아우르는 거대 연맹국가, 돌궐 제2제국의 전성기를 연다. 당의 군사력이 저하되고, 여러차례의 패전으로 이것이 알려졌으며, 이를 틈탄 돌궐의 재건은 여타 이민족들에게도 독립을 시도할 동기가 되었다. [[측천무후]]는 이를 제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결과 안서4진을 수복하고 거란의 대규모 반란은 돌궐의 힘을 빌려 저지하였지만 [[발해]]의 독립은 막지 못했고, 도호부들을 중국 본토 내, 또는 인근 지역으로 옮길 수밖엔 없었다. '''당 초기의 기미지배체제는 이것으로 사실상 끝났다.''' 물론 이후에도 다수의 이민족들이 기미부주에 속하여 당의 영향을 받고 부족의 전사들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당태종 시기처럼 북방 유목민족들에 대한 광범위한 지배권을 확보하지는 못했고 통합된 정치체를 무너뜨리고 부족 수준으로 쪼개어 통제하지 못했다. 단순히 기미부주를 확보하고, 이곳으로 부족들을 사민시켜 관리하는 것을 넘어 그 외곽, 사민되지 않은 이민족 세력들에 대해서도 도호부를 설치하고 관리하는 등 통제력을 행사하며, 부족연합체가 형성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