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령 (문단 편집) == 역사 == 단령을 [[중원]]의 [[한족]] 왕조들이 고안한 순수 [[한푸]]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단령의 기원은 [[서역]][* [[후한]]에서 [[진나라]](晉) 시기 사막지대의 바람을 피하기 위한 피풍의 곡령(曲領).] 및 북방민족이 입던 의복인 [[호복]]에서 비롯한 옷으로, 중원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 때 처음 등장한다. 이후 선술했듯이 튀르크 또는 퉁구스 계열 북방계 이민족인 [[선비(민족)|선비족]] 출신의 호한 혼혈 무천진 [[관롱집단]]이 세운 국가인 [[수나라]]와 [[당나라]]가 단령을 [[관복]]으로 채택하여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진 것이다. 중국의 손기(孫機)는 『中國古輿服論叢』 「南北朝時期我國服制的變化」에서 단령포를 '[[남북조시대]]에 [[서역]]의 [[호복]]과 [[선비족]]의 복식이 융합하여 탄생한 산물'이라고 이야기했다. [[중앙아시아]]의 합임포인 [[http://www.koreascience.or.kr/article/JAKO200331559975240.pdf|칸디스(kandys)]]에서 단령의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기원전 4세기 [[알타이]] 지방 유적에서 단령으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선비족은 원래 직령 형태의 포를 입었으나 4세기 들어 서역의 영향으로 단령을 입게 되었고 그것이 [[수나라]]와 [[당나라]]의 관복이 된 것이다. 그렇게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쳐 4~5세기경 고대 한국으로 전해졌다. [[신라]]는 [[법흥왕]] 때 관등의 높이에 따라 자색, 비색, 청색, 황색 순으로 공복을 규정했다가 [[진덕여왕]] 2년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단령을 들여온 것이 처음이며, [[고려]] 때에도 신라의 관복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다가 왕권 강화에 큰 힘을 쏟은 [[광종(고려)|광종]] 11년 3월에(960년) 고려식 4색 공복 제도를 시행하였다. 고려시대의 4색은 자색, 단색, 비색, 녹색이었다. [[원 간섭기]] 시기에는 원나라식 관복인 질손을 입었고 이후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설장수]]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홍무제]]로부터 [[사모]]와 함께 다시 들여왔고, [[정몽주]] 등의 주장으로 관복화 되었다. [[우용곡]] 작가가 그린 [[https://m.blog.naver.com/dndudwp99/221350375059|조선 관복 변천사]] 참조. 조선시대의 단령은 처음에는 잡색단령을 착용했다가 [[세종]] 28년부터는 아청색빛의 흑단령으로 통일되었다. 이후 상복의 띠 만으로는 상하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고 하여 조선 [[단종(조선)|단종]] 2년(1454년) 때부터 가슴과 등에 [[흉배]]가 달리고[* 처음에는 당상관만 단령을 달았다. [[삼정승]]과 좌우 [[찬성(관직)|찬성]]은 공작, 좌우 [[참찬]]과 [[이조(조선)|이조]], [[호조(조선)|호조]], [[예조]], [[형조]]의 [[판서]], [[한성판윤]], [[대제학]], [[제학]], 이조, 호조, 예조, 형조의 [[참판]], 한성 좌우윤, [[관찰사]] 등은 운안, [[승정원|육방승지]], 이조, 호조, 예조, 형조의 [[참의]],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목사(관직)|목사]], [[도호부|대도호부사]] 등은 백한을, [[병조]], [[공조(조선)|공조]]의 판서, [[오위|도총관]], 병조, 공조의 참판, 부총관, [[병마절도사]] 등은 호표를, [[수군절도사]], 오위장, 병조, 공조의 참의, 병조참지, 병마절제사 등은 웅비를 달았다. 도통사는 해치 흉배를 달았다. [[연산군]] 때는 모두 단령을 달았으며, 이 때 기러기, 돼지, 사슴, 거위 등의 흉배를 달았다. 그 뒤 [[명종(조선)|명종]]과 [[선조(조선)|선조]] 시기에 흉배가 약간 변형되었으며, [[광해군]] 때는 도통사의 흉배인 사자와 대사헌의 흉배인 해치가 없어지고, 도통사는 호표 흉배로, [[대사헌]]과 대사간은 운안 흉배로 통일했다. [[인조]] 이후에는 [[문관]] [[당상관]]은 운안, [[무관]] 당상관은 호표, 그 외에는 백한, 웅비를 다는 것으로 통일되었다. [[영조]] 이후에는 문관 당상관은 운학, 무관 당상관은 호표, 그 외에는 백한, 웅비를 달았으며, 색깔도 흑갈색과 흑남색으로 바뀌었다. 고종 때는 서양화의 영향으로 쌍학, 단학, 쌍호, 단호로 통일되었다가 1900년에 군신의 복식을 서양화하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 뒤로도 한동안은 혼용되었다.] 소매가 점차 늘어졌고 품 또한 넓어졌다. 인조 이후의 조선후기로 들어서는 쑥색빛 현록색의 흑단령이 상복이 되었고 이는 [[고종(조선)|고종]]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1900년에 관복이 [[양복]]으로 바뀌면서 단령은 사라지게 되었다. 백관 상복의 흉배는 사각형으로, 1897년(고종 34년) 기록을 보면 왕족은 [[기린(상상의 동물)|기린]](麒麟), 문관 당상관(정3품 이상)은 [[두루미|쌍학]], 당하관은 단학, 무관 당상관은 [[호랑이|쌍호]], 당하관은 단호이며, 이를 보여주는 실물도 상당수 남아 있다. 초기 흉배의 크기는 상복의 가슴을 모두 덮을 정도로 컸지만, 말기에는 작아졌다. [[왕실]]과 [[사대부]] 여성들도 [[임진왜란]] 전까지는 단삼이라는 이름으로 단령을 입었는데, 사대부 여성들이 대례복으로 입을 시에는 단삼에도 남편의 품계와 같은 흉배를 수놓거나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외형적으로도 서로 차이점이 별로 없어 단삼을 남자의 관복으로 고쳐입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후 단삼은 원삼이라는 이름으로 리폼, 변형되었는데 원삼 역시 초기에는 이전의 단삼 및 단령과 같이 옆으로 여며입는 형태였다. [[조선시대]] [[영조]], [[정조(조선)|정조]] 시대 때에는 [[http://www.insight.co.kr/news/129236|정삼품 이상 당상관들만이 분홍색(담홍색 시복)]] 단령을 입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 분홍색 단령을 착용한 것이 초상화를 통해서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21세기 분홍색이 여자의 전유물로 쓰이는 것을 감안하면 확연하게 격세지감이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한국]]의 단령은 구조적인 면에서도 [[한복]]의 영향을 받아 [[로컬라이징]]이 되어 다른 나라들의 단령과 일부 차이를 보이는데, 초기에는 당나라에서 들여온 형태 그대로 매듭으로 된 맺은단추로만 옷깃을 고정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맺은단추는 깃 쪽에서만 남고 다른 부분은 한복식 [[옷고름]]으로 여미게 되며 [[도포]] 처럼 넓은 소매가 생기는 등 기존 한복의 구조를 띄게 변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예복의 역할을 하는 상복이 흑색으로 고정된 이후 아청색(검정+파랑)에서 현록색(검정+초록)으로 단령의 색이 바뀐다. 사극에서는 관리의 높낮이에 따라 높은 관리가 홍색 단령을, 낮은 관리는 청색 단령을 입는 것처럼 나오는데 품계에 따라 색이 달랐던 것은 흉배가 없는 시복이었고, 흉배가 있는 상복은 임진왜란 후 시대에서는 [[산계]]가 어떻든 모두 상복으로 흑단령을 착용했으므로 이는 '''[[창작물의 반영 오류|오류]]'''에 해당한다. 한편 단령은 [[결혼식/전통 혼례|혼례식]]에서 신랑 예복으로도 사용했는데, 이는 벼슬있는자의 관복을 착용함으로써 [[결혼식|결혼예식]]을 일생을 통한 최고의 경사스러운 의식으로 여겼음을 나타낸다. 혼례복으로 단령을 착용할 시 자색이나 남색의 관복을 입고 각띠를 띠고 흉배를 달았는데 신랑예복의 흉배는 당상관과 같은 쌍학을 달았다. 청나라 때는 [[조선]] 사람들이 사신으로 오거나 [[중국]] 유학자들이 조선에 갔을 때 조선 사람들의 옷과 상투를 보고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명나라]]의 옷이다!'라면서 통곡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의 단령은 이미 로컬라이징 되었기 때문에 상당부분 착각이며 상투도 중국과는 엄밀히 세세한 면에서 차이가 크다.) 반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나라에 가서 변발, 치파오 오랑캐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통곡했다고 한다. 청나라가 한족들에게 자기네 유목민 풍속이었던 변발과 치파오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