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두대 (문단 편집) === [[남베트남]] === 서술했듯 프랑스 식민정부의 영향으로 아시아에서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사형 집행에 쓰였는데, 이후 [[알제리]]처럼 베트남이 독립하게 되면서 [[북베트남]]에서는 단두대형 대신 [[총살형]]이 도입되었고, 현재의 베트남에서는 [[약물주사형]](군인은 주사형과 총살형 중에서 선택)을 집행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에서는 [[응오딘지엠]] 정부가 독립 이후에도 계속 단두대형으로 은밀하게 사형을 집행했고 그 때 쓰였던 단두대가 아직까지 박물관에 남아있다. [[레꽝빈]]을 비롯한 남베트남 초기 군벌 지도자나 [[까오다이교]], 호아하오교 등의 신흥종교인들, 공산당원, 갱단원 및 그 외 기타 [[응오딘지엠]]의 정적들이 항복이나 전향조차 거부당하고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았다. 1959년 [[응오딘지엠]] 정부가 시골에 은둔한 공산당원들을 잡아내기 위해 공표한 10/59 법령 이후로는 아예 대놓고 프랑스 식민 정부 시절 썼던 그 단두대를 꺼내다가 시골 주민들에게 돌려 보이며 공포감을 조성했다. 하지만 무분별한 단두대의 사용, 특히 [[레꽝빈]]의 항복 거부 후 처형은 오히려 민중들에게 큰 역효과를 일으켰고[[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640506|#]], 단두대 사용 기점으로 응오딘지엠의 정치적 명분은 거의 없다시피하게 변했다. 마지막 처형은 1960년 호앙 레 카(Hoàng Lê Kha)가 [[http://www.executedtoday.com/tag/hoang-le-kha/|처형]]된 것이었다. 이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아직 프랑스 제국주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할 때 주요 빌미가 되었다.[* 진짜로 [[응오딘지엠]]이 친불적인 인사였다기보다는, 당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된 베트남인들의 심리적인 공포를 이용했다고 평가된다. 애시당초 응오딘지엠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권력을 잡고 제일 먼저 한 것이 친불 인사 숙청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휘하에 친불인사 출신 수하들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이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과거는 결국 응오딘지엠의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준다. 자세한 것은 [[응오딘지엠]] 문서 참고.] 이 문서의 맨 위에 있는 사진이 바로 옛 남베트남 교도소에서 쓰였던 단두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