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카히토 (문단 편집) ====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대한 태도 ==== 1950년대 후반부터 기원절(紀元節)의 부활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자, 학자적 입장에서 [[진무 덴노]]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정하여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이때 1959년 ≪일본의 새벽;건국과 기원을 둘러싸고(日本のあけぼの 建国と紀元をめぐって)≫라는 책을 간행했다. 이 책에서 그는 >'''거짓을 말하는 자가 애국자로 칭송받고 사실을 말하는 자는 매국노로 매도당하는 세상을 나는 경험했다.''' > 偽りを述べる者が愛国者とたたえられ、真実を語る者が売国奴と罵られた世の中を、私は経験してきた。 라는 말을 하기도 해서 제법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빨갱이 왕자님'이라는 별명을 얻은 건 바로 이때이다. 해당 책을 집필했던 당시 일본 극우파들은 다카히토 친왕을 극렬 비난하면서 그를 황적에서 파낼 것을 대놓고 요구하기도 했으며, 우익 단체가 미카사노미야 저택 앞에서 면담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언론 매체를 통해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행위에 대해 [[한국]]과 [[중국]]에 사과해야 한다"'''며 잘못을 인정하는 발언을 2차례 가량 하였다. ≪동방학 회상(東方学 回想) VIII. 학문의 추억 3.≫이란 책에서 모리 마사오(護雅夫), 나카네 치에(中根千枝) 등 5명의 학자들과의 좌담회에서 지난 전쟁 시기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1943년 1월 나는 중국파견군 참모로서 [[난징]]에 있는 총사령부에 부임해서 1년간 근무했다. 그 사이 나는 [[난징대학살|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알고 말았다.''' >'''성전(聖戰)이라는 대의명분이 사실과 한참 떨어져 있었으니까, 그 내용이 정의의 전쟁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겉으로는 성전이라고 강조할 수밖에 없던 게 아니었을까.''' >'''이렇게 성전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상실한 나로서는 오직 평화만을 바랄 뿐이었다.''' 1998년 [[중국]]의 [[장쩌민]] [[주석(직위)|주석]] 방일 당시 궁중연회 자리에서는, '''"[[중국인]]들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또한 [[중일전쟁]] 당시 어록과 [[난징대학살]] 희생자 수에 관해 남긴 어록은 다음과 같다. >"'황군이 그 이름에 반하는 행위(폭행, 약탈)를 하고 있는 지금은 현지인으로부터 존경 따위 받을 리 없다. 지금의 황군에 필요한 것은 장비도, 계획도 아닌 '반성'이다. 스스로를 돌이켜 스스로를 삼가고 일거수일투족이 큰 뜻에 어긋나지 않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볼 것."' >"皇軍がその名に反する行為(暴行略奪など)をしている、これでは現地民から尊敬などされるわけがない。今の皇軍に必要なのは装備でも計画でもない、“反省”だ。自らを顧み、自らを慎み、一挙一動が大御心に反していないかを自身に問うこと" >"'피해자 수가 논의되고 있지만, 숫자가 문제인 게 아니야. 학살이 이루어진 것 자체가 문제야."' >"犠牲者数が議論されているが、数が問題なのではない。虐殺が行われたこと自体が問題なんだ" [[http://m.cafe.daum.net/eroyal/C5vy/8363?listURI=%2Feroyal%2F_rec%3Fpage%3D4|출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