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이묘 (문단 편집) == [[에도 시대]] ==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중앙집권 권력을 강화하고, '막번 체제'를 만들었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는 [[고쿠다카]]가 1만 석 이상인 봉지가 있고[* 단 [[고쿠다카]]가 0인 다이묘가 하나 있었다. [[홋카이도]] 남부 [[마츠마에 번]]을 다스린 [[마츠마에]] 씨로, 홋카이도 기후 특성상 당시 농법 기준으론 쌀이 자라지 못해 쌀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재는 고쿠다카는 無였다. 그러나 [[아이누]]들과의 교역으로 수익을 냈기 때문에 1만 석 격(格)의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그 외에도 [[쓰시마 섬]]을 다스리는 소(宗)씨도 실제로는 쓰시마가 원체 험한 산지라 고쿠다카가 1만 석보다 훨씬 적었지만 마찬가지로 [[조선]]과의 무역을 사실상 독점했기 때문에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또한 키츠레가와(喜連川) 번을 다스렸던 [[아시카가]]씨는 5천석에 불과해 하타모토급이었지만, 막부에서 옛 [[무로마치 막부|무로마치 쇼군]]에 대한 예우로 10만 석 격 다이묘로 인정해주었다.] 쇼군으로부터 직접 영지를 하사받는다는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세력이 큰 다이묘의 가신 중에는 다이묘로부터 하사받은 봉지가 1만 석 이상이 될 수도 있지만[* 다이묘마다 제각각이긴 하지만 다이묘의 영지 내에서도 다이묘가 직할하는 경지는 전체의 20%에서 아주 많아야 50% 미만이었다.] 쇼군에게 직접 하사받은 게 아니라 다이묘가 재분배한 것이기 때문에 다이묘라고 하지 않는다. [[쇼군]]에게 직접 봉지를 받았지만, 영지가 만 석 미만인 자들은 [[하타모토]](旗本)라고 한다. 이들은 쇼군의 직속가신[* [[다이묘]]도 형식상으론 쇼군의 가신이다. 쇼군을 대통령이라고 놓고 본다면, 각부에 장관들을 임명하여 보내듯 다이묘들이 각자 맡은 영역에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반면 대통령의 업무를 직속 보좌하기 위한 청와대 [[수석]]들이 있듯, 하타모토들이 쇼군을 곁에서 보좌한다. 대외적으로는 장관(=다이묘)들의 명망과 지위가 훨씬 높으나, 주요 업무 수석(=쇼군 직속 하타모토)들이 권력 최측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듯, 서로 동렬에 놓고 평가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이며, 쇼군을 직접 알현할 자격이 있었다. 더욱이 다이묘의 가신들이 아무리 봉지로 받은 땅이 많다고 하더라도, 고쿠다카가 20~30석에 불과한 하타모토보다도 원칙적으로는 낮은 신분이었다. 아무리 적은 고쿠다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쇼군이 직접 임명한 영주이기 때문이다. 하타모토 밑에는 고케닌(御家人)이라는 계급이 있었다. 다이묘의 영지를 가리키는 비공식적인 용어로 [[번(제후국)|번]]이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에도 막부 시절 대부분에는 통칭에 머물러 쇼군은 번이 아닌 다이묘 본인이나 다이묘 가문에 명령을 내렸지만, 판적봉환-폐번치현 사이의 2년 동안에는 공식적인 용어가 되었다. [[에도 막부]]의 다이묘는 세 가지 구분이 있었다. * [[도쿠가와]]씨, [[마츠다이라]]씨 등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계에 속하며 군사적 요충지를 영지로 장악한 신판(親藩) 다이묘.[* 신판 다이묘 중에서도 특히 중요성이 높은 다이묘들이 이른바 [[고산케]]로, 쇼군의 후계자를 정할 수 없을 때에 후계자를 낼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한국식 독음으로 친번 다이묘라고도 하며, 이들이 다스리는 번을 (도쿠가와) 친번이라고 한다. * [[세키가하라 전투|세키가하라]] 이전부터 도쿠가와에 속했거나, 신판도 도자마도 아닌 다이묘였던 후다이(譜代)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들은 영지 자체가 크지는 않았지만[* 가장 강력한 후다이 다이묘였던 이이 가문의 [[히코네 성|히코네]] 번의 명목 석고가 30만 석이었고, 쇼나이나 [[히메지 성|히메지]], 코리야마 등 그 다음으로 큰 후다이 번들은 명목 석고가 20만 석에 채 미치지 못했다.] 막부의 고위 관료직인 로주 자리를 자주 차지하는 등 막부 실무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았다.[* 신판 다이묘와의 차이점이 이것으로 신판 다이묘는 종친이였기 때문에 격 문제나 견제 등으로 인해 이런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 모리, 시마즈 등 도쿠가와에게 저항하던 적대 다이묘나 최근에 복속한 [[도자마 다이묘|도자마(外樣) 다이묘]]. 이들은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을 근거로 하였다. 위험분자들을 중앙에서 멀리 떼어놓아 혹시 모를 반란에 대비할 시간을 벌자는 의도라는 해석도 있지만 정작 조슈의 모리, 사츠마의 시마즈 등은 그냥 센고쿠 시대부터 자리잡았던 원래의 본거지를 지킨 것이라 이에 해당되지는 않으며 시마즈 같은 경우 오히려 너무 멀어서 군사적 압박 대신 세력권을 인정해주는 선에서 타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명목상 서군 총대장이었던 모리 가문은 하마터면 [[가이에키]]당할 뻔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120만 석이 36만 9천석으로 깎이는 처벌을 받았다.[* 실제로는 무능한 총대장 [[모리 데루모토]], 배신자 [[킷카와 히로이에]], 배신자가 길 막고 있다고 도시락 먹는다는 핑계나 대다 도망간 [[모리 히데모토]] 등 모리 가문은 오히려 동군의 완승에 일조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입장에서 이들은 반군 지도부였고, 이에야스는 원래 모리 가문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세키가하라 전에 킷카와 히로이에와 도쿠가와 세력 간 밀약이 있었는데, 이에야스는 모리 가문을 가이에키하고 히로이에에게 모리의 옛 영지 상당 부분을 떼어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를 안 히로이에가 자신이 받기로 되어있던 영지를 데루모토에게 돌리면서까지 그를 살리려 하였기에 가이에키까지는 가지 않았다. 모리에게 남겨진 조슈 번은 원래는 이에야스가 히로이에에게 줄 예정이었던 영지였다.] 이는 [[조슈 번]]이 막말 토막파의 선봉에 서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모든 도자마 다이묘가 조슈처럼 박한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고,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에 서는 등 대놓고 도쿠가와를 적대한 적이 없는 도자마 다이묘들은 준 후다이, 신판 취급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카가 번]] 100만 석으로 유명한 [[마에다]] 가문이나 [[다테 마사무네]]의 다테 가문. 마에다 가문은 아예 의전서열에서 [[고산케]], 고산쿄 바로 다음에 위치해 마츠다이라 친번 다이묘들까지도 뛰어넘는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사쓰마의 경우 다소 애매한데, 막부 초기에는 박한 대우를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모리처럼 영지를 대폭 뜯긴 것은 아니었던 데다, 막부 후기로 갈수록 나름대로 좋은 관위나 예우를 받고 막부의 외척이 되기도 하는 등 완전히 푸대접받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주로 규슈를 비롯한 서남부나 도호쿠 등 에도와 먼 곳에 자리잡은 도자마 다이묘들은 이미 개발된 간토나 키나이 등 막부 직할령, 신판/후다이 다이묘령에 비해 명목상 석고는 낮았지만 큰 개발 잠재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조슈 번은 명목상 30만 석 정도였다가 모리 가문의 지속적인 개발로 막말에는 실질 100만석의 강력한 번으로 성장했으며, 다테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에게 100만 석을 주겠다는 약속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센다이 번을 실질 100만석으로 키워내기도 했다. 막부에서도 이를 좌시하지는 않고 중규모 영주에 대해서는 개역이나 전봉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견제했으며[* 가문 총 영지가 수십만 석에 달하는 대형 번의 경우 상속 시 형제간의 다툼 방지, 혹은 번 행정 합리화 등을 목적으로 가문 내에서 분할상속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중앙에서 쇼군은 이를 용인하였다가 나중에 꼬투리를 잡아 영지를 조금씩 뜯어가며 대형 도자마 가문들을 견제하기 일쑤였다.], 20만 석 이상의 도자마 다이묘들은 영지가 에도로부터 멀긴했지만 에도성 방문 때 별도로 특별대우를 받는 등 표면상으로는 막부 내내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고키시치도]]에서 율령국 하나를 통째로 영지를 가진 다이묘들을 고쿠슈(국주, 国主) 또는 혼쿠니모치(본국지, 本国持), 율령국 하나를 지배하지는 않지만 고쿠슈와 비슷한 힘을 가진 다이묘들을 타이신 쿠니모치(대신국지, 大身国持), 고쿠슈에 준하는 격의 10만 석 수준의 다이묘들을 준쿠니모치(準国持) 또는 준고쿠슈(準国主)로 따로 예우하기도 했다. 마에다, 시마즈, 모리 등 고쿠슈 10~12가문[* 에도 시대를 거쳐 [[도도 다카토라]]의 후손인 츠 번 도도 가문, [[마쓰에]] 마쓰다이라 가문 등 2가문이 추가되었다.], 다테, 호소카와, 나베시마 등 타이신 쿠니모치 약 10가문, 타치바나, 니와 등 준쿠니모치 3가문이 있었으며 일부 마쓰다이라 가문들을 제외하면 모두 도자마 다이묘에 해당했다[* 이들 중 대부분이 명예 칭호로 마쓰다이라 성씨를 수여받았다.]. 이들은 최소 10만 석, 보통 20만 석 이상을 석고로 가졌고 고쿠슈-준고쿠슈-성주(城主)-성주격(城主格)-무성(無城)으로 이어지는 에도 막부 다이묘 서열에서 최고위에 위치하는 대가문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율령국의 [[태수]](고쿠시, 国司)를 자칭하는 특권을 가지기도 했다. 다이묘들이 쇼군을 알현할 때의 대기실인 시코세키(伺候席)를 예로 들면, 가장 상석에 해당하는 오오로카세키(大廊下席)를 [[고산케]], 고산쿄 등 쇼군가와 가장 가까운 친족들이 채웠고, 마에다 가문은 도자마 다이묘로서는 유일하게 종3위 참의 관직을 받고 오오로카세키에 포함되었다. 아이즈, 타카마츠 등 일부 마츠다이라 가문과 후다이 필두격인 히코네 이이 가문 등은 고쿠슈 다이묘들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관위를 가졌고 쇼군의 집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타마리즈메(溜詰)에 따로 배정되어 쇼군의 최측근으로서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그 다음으로 높은 관위 및 의전을 받은 것이 종4위하(従四位下) 관위를 부여받은 고쿠슈 가문들로, 오오히로마세키(大広間席)를 배정받았다. 고쿠슈 다이묘들은 다른 다이묘들과 달리 가독을 상속하자마자 종4위하를 보장받았다. 영지의 삭감이나 개간으로 인해 구체적인 수치는 달라지지만, 에도 막부의 쇼군의 경우 대략 300~400만 석에 이르는 영지를 직할로 다스렸다. 게다가 수족과 같이 부릴 수 있는 [[하타모토]]들에게 나눠준 영지가 300만 석 정도였으니, 실질적으로는 600만 석 이상의 힘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 반면 가장 넓은 영지를 보유했던 몇몇 다이묘들의 영지는 100만 석 정도였으니[* 명목상 석고는 마에다 가문의 카가 번이 유일하게 102만 석으로 100만 석을 넘었고, 친번, 도자마, 후다이를 안 가리고 나머지는 모두 75만 석을 넘지 못했다. 메이지 시대에 측정된 실제 석고로 따져도 카가 번과 다테 가의 센다이 번, 모리 가의 조슈 번 셋만이 100만 석 규모였다. 그나마 이에 준할 만한 번도 시마즈 가의 사츠마 번, 고산케의 일원인 오와리 도쿠가와 가의 오와리 번, 나베시마 가의 사가 번 정도고 나머지는 50만 석은커녕 10-20만 석인 번도 태반이었다. 다만 재미있는 점은 유력 도자마 다이묘의 경우 친번이나 후다이보다 세력이 큰 데다 영향력도 강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주로 큐슈 등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다이묘들이 해당되었다.] 일개 다이묘로서 쇼군에게 반항하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사면 영지를 몰수당하는 게 일상다반사였는데 그나마 막부가 정착하면서부터는 죽이거나 평민으로 강등하지는 않고 영지 몰수 뒤 그대로 무사 지위를 유지하게 하는 게 일반적이며,[* 이 경우도 당사자는 할복해야 했다. 보통 끌고 와서 참수하고는 그냥 서류에만 할복으로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운이 좋으면 조정으로 불러 [[하타모토]]로 삼았다. 다만 이것은 비교적 세력이 작으면서 에도와 긴키에서 멀지않은 지역의 다이묘들 이야기이고 막부 극초기를 제외하고 20만 석 이상의 도자마 다이묘가 전봉되거나 가이에키된 사례 자체가 없다. 사실 막부 역시도 가이에키를 자제해야 했는데 왜냐면 가이에키 한번 할 때마다 대량의 실업자, 그러니까 로닌이 발생하는데 이 로닌들은 막부에 대한 불만이 커서 틈만나면 반란을 일으켰기에 에도시대 내내 사회문제였다. 또,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미츠]] 때부터 일종의 [[인질]]제도인 [[참근교대]]라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수도에 다이묘의 가족을 모아놓아[* 따라서 막부 시절 초기 다이묘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다이묘들의 고향은 '에도'였다.] 반란을 통제했고[* 한국에서는 [[신라]]의 [[상수리제도]], [[고려]]의 [[기인제도]]가 이와 비슷하다.] 1년을 주기로 다이묘 본인이 일정기간 에도에 머무르며 쇼군을 알현하고 정무를 보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게 했다. 이것은 다이묘 돈을 소모하며 영지와 수도를 오가게 하여 그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물론 괴롭히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실제로 이 과정에서 전국으로 물자가 돌기 때문에 그만큼 지역 불평등이 완화(?)되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 인질이라고 하더라도 높은 신분 간 거래에 가까웠기 때문에 인질의 취급이나 대우가 상당히 정중했고, 일정구역 안에서는 불편함 없이 살곤 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이런 형태의 인질은 많지만 양측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나빠지지 않는 이상 최상급 대우를 받으면서 지내고 최고급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는 인질을 잡고 있는 입장에서도 잘 대우해 주어서 인질이 가독을 계승했을때 자신의 영지나 국가보단 인질로 지낸 지역에 애착을 가지게 되고 동맹세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다이묘의 에도 행차 행렬은 일종의 다이묘들의 세력과시이기도 해서 다이묘들은 수천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화려한 행차를 해서 재력을 과시했다. 오히려 막부에서 지나친 재력과시 경쟁을 막기위해 번의 고쿠다카에 따라 수행원의 규모를 제한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러한 다이묘의 행차의 정례화와 과시는 지방과 에도 사이의 교통과 문화와 경제 교류를 증대시키고 행차가 지나가는 역참지마다 상업을 번성하게 하고 에도의 소비문화를 꽃피우는 등 긍정적 효과가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적으로 막부가 약해지자 지방 번들이 점점 강해지면서 이전처럼 다이묘들에게 강경책을 쓰기는 점점 어려워졌고[* 오히려 후기로 갈수록 도자마 다이묘들은 막부가 먼 지방을 통치하는 데 중요한 기둥 역할을 하게 된다. 막부에 저항한 [[조슈 번]](長州藩)을 토벌했다고 해서 여러 세대 동안 에도에 거주하고 친막부 성향에 지방을 통제 가능한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모리 가문을 가이에키 한다는 것을 막부가 상상하기 힘든 입장이 된다.],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감시하기에도 불리해지는 역효과가 있었다. 결국 막부 말기로 가면 다이묘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참근교대]] 등의 규제도 완화하는 식으로 타협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막말의 시마즈, 야마우치 등 도자마 다이묘들은 정작 친 막부 성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이미 도쿠가와 쇼군가와의 혼맥으로 막부에서도 권세가 있는 가문이었고 다이묘들의 본가는 이미 오랫동안 에도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다이묘 자리를 물려받으면 일정기간씩 영지로 내려가서 집무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번의 하급무사들과는 인식의 차이가 상당히 있었다. 하지만 유력 다이묘들은 막부 전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앙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야심을 표출하게 되었고, 이들의 힘이 미토학으로 대표되는 [[존황양이]] 이념의 세례를 받은 조슈, 사쓰마, 도사 같은 대형 도자마 번의 하급 무사들(下士)들과 결합하여 결과적으로 이들은 후일 에도 막부 타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메이지 신정부는 하급 무사들이 장악했다는 점에서 죽 쒀서 개 준 꼴로도 볼 수 있다. 신정부에서는 [[판적봉환]] 이후까지 다이묘들이 갖고 있던 각 번의 지사직을 [[폐번치현]]으로 몰수하고 도쿄로 소환했으며 대신 중앙에서 현령(후에 현지사로 바뀜)을 임명하게 되었다. 대신 옛 상관들에게 공작, 후작 등 [[화족]] 작위를 수여하는 등 어느 정도 대우는 해 주었고, 각 번의 빚은 중앙정부에서 탕감하고 구 번 수익의 일부(10%)를 구 다이묘들에게 인정해 주었다. 오히려 대형 번으로 공후백 급 상위 화족을 받은 가문들보다도, 지방에서 작지만 알짜배기 가업들을 [[대물림]]하며 지방 유지가 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방 토호로 잘 먹고 잘 사는 가문들도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