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이묘 (문단 편집) == [[무로마치 시대]] ~ [[센고쿠 시대]] == [[무로마치 막부]]는 개개의 쿠니[* 국(国). 당시 일본에서의 이 글자의 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주권국이 아닌 '도' 정도의 의미에 가까웠다.]를 막부에서 임명한 [[슈고 다이묘]]에게 찢어 주고, 막부가 있는 [[교토]]에서 거리가 먼 지역에는 넓은 범위를 통솔하는 탄다이(探題, 탐제)를 두었다. 또 중앙 교토에는 쇼군 다음가는 [[간레이]](관령)를 두고, [[간토]](관동)에는 쇼군 대신 간토를 다스리는 간토 쇼군[* 간토 쿠보(관동 공방), 가마쿠라 쇼군(쿠보)이라고도 한다.](관동 장군)을 두고, [[간토 간레이]](관동 관령)로 보좌하게 했다. 그러다 [[오닌의 난]] 등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지방 통치 능력이 쇠락함에 따라 이들 슈고쇼쿠(守護職, 수호직)를 부하이자 대리인인 슈고다이(守護代, 수호대)나 여타 다른 이유로 그 지방에서 힘을 얻은 세력이 힘으로 쳐 없애거나 실권이 없는 괴뢰를 옹립했다가 자기가 센고쿠(戦国) 다이묘에 오르는 이른바 [[전국시대(일본)|센고쿠시대]]가 시작되었다. 드물지만 [[천황]]이 임명한 지방관인 고쿠시가 다이묘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센코쿠 다이묘의 루트를 대략 분류하자면, * '''슈고 다이묘가 그대로 센고쿠 다이묘가 된 경우''' * [[다케다 신겐|다케다]] 가문 ([[야마나시현|카이]]), [[시마즈]] 가문 ([[가고시마현|사츠마]]), [[오우치]] 가문 ([[야마구치현|스오우·나가토]]), [[이마가와 요시모토|이마가와]] 가문 ([[시즈오카현|스루가]]), [[다테 마사무네|다테]] 가문 ([[미야기현|오슈]]), [[오토모 소린|오토모]] 가문 ([[오이타현|분고]]), 토키 가문 ([[기후현|미노]]), 롯카쿠 가문 ([[시가현|오우미]]), [[사타케]] 가문 ([[이바라키현|히타치]]) 등 * '''슈고 다이묘의 가신이자 대리인이었던 슈고다이가 센고쿠 다이묘로 올라 선 경우''' * [[우에스기 겐신|우에스기]] 가문[* 원래는 [[치바현|보소]] [[타이라 가문|헤이시]] 방계 에치고 나가오 가문.] ([[니가타현|에치고]]), [[아마고 츠네히사|아마고]] 가문 ([[시마네현|이즈모]]), [[오다 노부히데|오다]] 가문 ([[아이치현|오와리]]), 진보 가문 ([[토야마현|엣츄]]), 벳쇼 가문 ([[효고현|하리마]]) 등 * '''각지의 유력 무사(고쿠진, 국인)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다이묘가 된 경우''' * [[모리 모토나리|모리]] 가문 ([[히로시마현|아키]]), [[사나다]] 가문 ([[나가노현|시나노]]), [[마츠다이라]] 가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가.] ([[아이치현|미카와]]), [[쵸소카베]] 가문 ([[고치현|토사]]) 등 * '''센고쿠시대에 가문을 새로 세워(가신이었다가 독립, 반역 후 가문을 차지) 센고쿠 다이묘가 된 경우''' * [[후호조씨|호조]] 가문 ([[가나가와현|사가미]][* 단,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데뷔 장소는 [[이즈(일본)|이즈 반도]]]), [[사이토 도산|사이토]] 가문 ([[기후현|미노]]), [[우키타 나오이에|우키타]] 가문 ([[오카야마현|비젠]]), [[츠가루 타메노부|츠가루]] 가문 ([[츠가루]], 혹은 [[아오모리현]] 서부) 등 * '''덴노가 임명한 지방관 고쿠시가 센고쿠 다이묘가 된 경우''' * [[이치죠 카네사다|이치죠]] 가문([[고치현|토사]]), [[기타바타케]] 가문([[미에현|이세]]) 등 다케다는 헤이안 시대, 카와치 겐지 일족 [[미나모토노 요시미츠|신라사부로]]가 [[이바라키현|히타치]] 지역으로 온 뒤, 그 후손임을 자청하는 히타치노쿠니 타케다 영지의 호족 타케다 미나모토노아손 노부요시(武田-源朝臣-信義)가 [[야마나시현|카이 슈고]]에 임관된 것을 시조로 삼는 카이 겐지의 후손이다. 다케다 가의 다른 일족은 주고쿠의 아키 국, 호쿠리쿠의 와카사 국의 슈고를 지내기도 했다. 타케다 노부요시는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관동 겐지의 패권을 두고 다툰 인물 중 한명으로, 매우 유서 깊은 가문이다. 신라사부로의 자손 중 히타치에 남은 후예가 히타치 슈고 사타케씨다. 두 가문은 자기들이 요시미츠의 정통 후계자라고 자존심 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굳이 족보를 따지자면 사타케는 요시미츠의 장남의 후손, 다케다는 3남의 후손이 세운 가문이었다. 시마즈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줄곧 같은 [[사쓰마]] 지방을 지배한 드문 케이스이다. 전국시대에 위기도 몇 번 있었지만[* [[규슈]] 통일을 눈 앞에 뒀다가 도요토미군에게 항복할 때,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 정국에서 하마터면 몰락할 뻔 했다.] 처신을 잘 해서 넘어갔다. 시마즈가 속한 고레무네 씨족은 겐지나 다이라, 후지와라 등에 비하면 다소 밀리긴 하지만 역시 그 역사와 전통은 남들에게 밀리지 않는 [[헤이안 시대]]부터의 명문이었다. 오우치는 모두가 겐지와 헤이시를 자청하던 시대에 대단히 특이하게도, 백제 부여씨의 왕손임을 자청하는, 타타라노 쿠다라노코니키시([[야마구치현|스오우노쿠니]] 타타라 지방에 영지를 받고, '''백제건길지'''라는 카바네(골품)를 받았다는 뜻) 가문의 일파라고 주장한다. [[오우치]] 문서 참조. 이마가와는 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 義兼)의 후손 키라 오사우지(吉良長氏)가, 미카와 지방 이마가와 영지에 봉해지면서 분가한 명문으로 스루가 슈고며, 시조의 이름에서 딴 우지氏를 돌림자로 삼았다. 단, 요시모토義元는 쇼군가문의 돌림자인 요시義를 막부로부터 받아 썼다. 키라씨는 이시도씨, 시부카와씨와 함께 [[무로마치 막부]]의 3대 가문 중 하나였는데, 정확히는 막부 성립 이전의 당주였던 제4대 야스우지의 두 형제가 각각 미카와 키라씨와 오슈 키라씨로 분가를 이루었고 이마가와는 이 중 미카와 키라씨의 초대 당주였던 키라 오사우지의 차남인 쿠니우지의 대에서 시작하는 가문이었다. 사실상 야스우지의 아들 대에서 분기한 [[시바(아시카가)|시바씨]]나 잇시키씨 등을 제외하면 무로마치 3관령가의 일원이자 아시카가의 분가였던 호소카와씨나 [[하타케야마씨]]보다도 아시카가 종가(쇼군가)에 가까운 일족이었다. 다테씨는 초기에는 지역의 유력 무사였으나, 다테는 가마쿠라 막부 시기부터 역사에 기록된 가문으로 오슈 탄다이 직과 무츠 슈고직 등의 관직을 역임해왔기에 실질적으로는 슈고 다이묘가 센고쿠 다이묘가 된 경우에 가깝다. 세력권이 오슈인 만큼, [[오슈 후지와라]]의 후손을 자칭한다. 다만 다테 다네무네 대에 우슈의 [[요네자와시]] 일대를 획득하자 이곳으로 본거를 옮겨, [[다테 마사무네]]가 잇키를 선동했다가 적발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몰수될 때까지 있었다. 호조 우지야스의 할아버지 [[호조 소운]]은 무로마치 막부의 간토 통치 기구라 할 수 있는 간토 구보 내에 내분이 일어나자 쇼군과 이마가와 집안의 도움을 받아 간토 구보의 일종인 호리고에 구보를 제거하고 세력을 쌓았으며, 아버지 [[호조 우지쓰나]] 대에 이마가와 집안에서 독립하고 점차 세력을 키워 마침내 호조 우지야스 대에 남아 있는 간토 구보인 고가 구보[*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가문]와 [[간토 간레이]][* 야마노우치·오기가야쓰 양 우에스기 가문.]를 모두 몰락시켰다. 간토의 우에스기 겐신은 원래 나가오 가문[* [[타이라 가문|간무 헤이시]] 타카모치류 [[간토|반도]] 헤이시 8분가([[카즈사]]씨, [[치바현|치바]]씨, [[미우라시|미우라]]씨, [[카마쿠라시|카지와라]]씨, [[치치부시|치치부]]씨, [[후지사와시|오오바]]씨, [[오다와라시|도히]]씨, [[카마쿠라시|나가오]]씨) 중 하나. 본디 사가미 지역 [[카마쿠라시|나가오 장원]]에 봉토를 받아 거기서 성씨를 따왔지만, 후손들이 흘러흘러 [[니가타현|에치고]]에 정착했기에 에치고 나가오씨라고 부른다. 타카모치류 간무 헤이시는 반도8헤이시 이외에도 [[미에현|이세]] 헤이시의 일파가 칸사이에 정착한 [[헤이케|후쿠하라 헤이케]], 쿠니카(国香)류 나오카타(平直方)가 [[이즈노쿠니시|타카타군 북조]] 지역에 정착한 걸 기원으로 삼는 카마쿠라 [[호조씨|싯켄 호죠]] 가문을 포함하는 등, 도저히 한 가족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다.--막부의 쇼군직 세습 가문인 겐지도 만만치 않게 매우 거대하다--]으로 에치고 슈고를 세습하는 에치고 우에스기 가문[*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지류.]의 슈고다이 집안이었는데, 아버지 [[나가오 다메카게]]가 주인 우에스기 후사요시를 쳐 없애고 우에스기 사다자네를 허수아비로 세워 센고쿠 다이묘화했다. 나중에 멸망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당주가 망명해오자 겐신이 그의 양자로 들어가서--[[칸토 칸레이]] 탈취-- 우에스기 성[* 본래는 교토 [[후지와라]] 홋케(北家)의 방계귀족 칸슈지(勧修寺)류의 일파로, 카마쿠라 막부 [[무네타카 친왕|6대 쇼군]]과 함께 관동으로 왔다가 무사로 변신해 관동에서 눌러 앉은 것을 기원으로 한다.]을 획득했다. 오다씨는 본래 에치젠 지방의 신관 가문 출신[* 후쿠이 현에 있는 츠루기 신사로 오늘날에도 존재한다.]으로 오와리와 에치젠을 다스리던 슈고 다이묘 시바씨의 당주가 당대 신관의 아들을 가신으로 삼아 오와리 지방의 슈고다이를 맡겼다. 이후 그 자손들은 여러 계통으로 쪼개져 자기들끼리 싸우면서도 슈고인 시바씨의 실권을 빼앗고 괴뢰로 만든 뒤 오와리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 시바씨의 가신 출신으로 에치젠을 빼앗은 게 [[아사쿠라 요시카게]]로 유명한 아사쿠라 가문이었다. 이쪽은 일찌감치 [[오닌의 난]] 때 동군과 에치젠 슈고직을 대가로 배반하는 약속을 맺은 것을 바탕으로 아예 에치젠 슈고직을 탈취했기 때문에 슈고 다이묘로도 취급된다. 이외에 아예 모반하여 주군을 쳐 없애고 그 자리에 올라앉는 것을 '게코쿠죠'([[하극상]])라고 하는데, 이것으로 유명한 자가 [[사이토 도산]]과 [[마츠나가 히사히데]] 등의 다이묘들이었다. 또한 이들 센고쿠 다이묘 중 상당수는 지방의 이름없는 호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정통파로 취급되는 겐지(원씨, 미나모토씨), 헤이케(평가, 다이라씨) 등의 족보를 거짓으로 가져다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겐지나 헤이케는 무사 집안이지만, [[헤이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덴노가와도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권위가 엄청 붙기 때문이었다.[* '[[신적강하]]'라고 해서, 덴노가의 인물이 결혼 등의 이유로 본적을 이탈하거나 일정 촌수 이상 덴노가에서 떨어진 방계가 되면 미나모토(겐지)나 다이라(헤이케) 등의 성씨를 택해서 가문을 건립했는데, 이래서 같은 겐지라도 세이와 겐지, 카와치 겐지 하는 식의 파벌이 존재했다. 물론 혈연은 상당히 멀어서, 사실상 덴노가와 인연이 있는 별개의 가문들. 그렇잖아도 방계이기 때문에 분가하는 터라 이렇게 덴노가에 연원하는 가문이더라도 몇 대가 내려가면 조정에서의 위치는 꽤나 내려갔다.] 가이 다케다 가문은 전통적인 권위가 있는 슈고였지만 [[오닌의 난]] 전후 무렵에 슈고였던 당시의 당주가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한때 호족들에게 주도권을 뺏겨 바지사장으로 전락했다가 다케다 신겐의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의 대에 주도권을 되찾으며 권위와 실권을 회복했다. 그래서 신겐은 라이벌인 우에스기 겐신이 주인을 쳐 없앤 센고쿠 다이묘인 주제에 막부에게서 권위를 인정받아 슈고의 상위 직책인 간토 간레이로 임명되자 자존심이 상해서 평생 우에스기씨(본래 간토 간레이인 우에스기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로 부르지 않고 계속 원래 성인 나가오씨로 불렀다고 할 정도이며,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정권 획득을 위해 교토로 대군을 이끌고 진공한 것은 이마가와씨가 아시카가 쇼군가의 분가 중 하나로서 쇼군 계승을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다이묘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조선에선 다이묘를 클 거 자와 [[우두머리 추]] 자를 써서 '거추'(巨酋)라 기록했고, 이들이 보낸 사신을 '거추사'(巨酋使)라고 기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