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방 (문단 편집) == 과거의 다방 == 거슬러 올라가면 1968년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에 다연원(茶淵院)이라는 [[경주시|경주]] 창림사에 딸린 다도실의 존재가 드러났고, [[고려]]에서도 [[개경]]에 많은 다점(茶店), 다방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에 이 다방을 설치하였다. 물론 현대의 다방과는 거리가 있다. 여기에서의 다방은 왕실이나 외국 사신에게 차를 대접하는 의례를 맡았다. 한반도 최초의 근대식 다방은 [[구한말]]인 1902년 [[서울]] [[정동]]에 있던 [[손탁호텔]](Sontag Hotel)에 부설된 것이지만, 본격적인 다방 문화의 시초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경성부|경성]] 이곳 저곳에 '끽다점'(喫茶店)을[* 다과를 만끽하는 가게라는 뜻으로, 다방 혹은 카페를 뜻하는 일본식 한자어이다.][* 의외로 일제강점기에는 카페와 '끽다점', 다방, 찻집 등의 표현이 혼용되었다. 그러나 [[8.15 해방]] 이후로는 다방이란 표현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끽다점은 철저하게 일본식 표현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 차리면서부터다. 남대문역([[서울역]])에 있던 끽다점과 1923년 [[종로]]에 생겨났던 '후타미'(二見) 등이 있었다. 물론 조선인이 차린 다방도 아주 없진 않았는데, 배우 [[복혜숙]]이 운영했던 '비너스'[* [[야인시대]]에 나오는 동명의 카페의 모티브. [[김이수(야인시대)|김이수]]가 주인이다.]와 시인 [[이상(작가)|이상]]이 생계를 위해, 예술가들이 모일 만한 장소를 만들기 위해 차렸던 '제비다방'이 가장 유명했다. 현재는 일제강점기에 개설된 다방은 모두 사라졌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방은 [[6.25 전쟁|전란]] 와중인 1952년 개업한 [[전주시]]의 '''삼양다방'''이다. 80년대까지 다방은 오늘날의 [[카페]]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많은 젊은 [[지식인]]과 [[예술가]]를 꿈꾸는 [[청년]]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던 곳으로, 그 문화는 전후 [[프랑스]]의 지성인들이 형성했던 [[카페]]의 지적 문화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 ~~비록 커피의 질과 맛은 많이 뒤지지만~~ 당시의 다방은 유럽의 살롱 역할에 가까웠다고 봐도 좋을 듯. 해방 이후 50년대 [[명동]] 일대의 다방에는 '''문인'''들이 죽치고 있었다. 문예회관에는 [[김동리]]와 [[서정주]]를 중심으로 한 기성 문단의 '선생님' 급 문인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다방에는 젊은 문인들이 꿰차고 앉은 식이었다. 청동다방에는 [[오상순]]이,[* 물론 오상순은 당시에도 육순을 넘긴 시인이긴 했다. 오상순은 청동다방에 드나드는 젊은이들을 강제로 붙잡고 글을 남기게 해 이를 '청동시대'라는 동인지로 만들기도 했다.] 포엠에는 박인환과 이봉구가 드나드는 식이었다. 특히 오상순은 '무소유'를 실천한 문인으로 유명한 만큼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었다.' 그래서 항상 그가 앉아있는 청동다방이 그의 주소지 노릇을 해서, 심지어 오상순에게 문안이나 세배를 오는 문인들도 청동다방으로 가야 했다. [[한국전쟁]]으로 다들 [[부산]]으로 피난갔던 시절에도 문인들이 다방에 모이는 건 똑같아서, 김동리는 부산에 피난온 문인들이 모이던 다방을 소재로 '''<밀다원시대>'''라는 단편소설도 썼다. 상황이 이런 탓에 다방 마담들도 문인들을 많이 배려해주었는데,[* 유명 문인이 죽치고 있으면 손님이 딸려오니 그랬겠지만.] EBS 문화사 시리즈 <[[명동백작]]>[* 드라마에 다큐 형식을 끌어들여 정보석이 해설하고 생존중인 관련인들의 증언을 삽입했다.]에는 다방 '모나리자'의 마담이 외상값에 못이겨 문을 닫으며 문인들이 맡겨두었던 시계, 신분증 등을 돌려주는 장면도 등장한다. 조병화는 자신이 드나들던 다방의 마담에게 헌정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명동이 소비문화의 중심지가 아닌 '창조'의 중심지 노릇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 60년대로 넘어가면서 문화 중심지가 대학로로 옮겨가고, [[대학로(서울)]] 주변에 '돌체' 등의 음악감상실이 생겼는데,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다방이었다. 대학로 일대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생과 법대생들이 애용했던 '''"[[학림다방]]"'''이라는 곳이 특히 유명했는데, 70년대 중반 학번들까지 거의 모든 학생들이 이 다방을 한 번 이상 이용했으며, 추억으로 생각할 정도. 현대 한국문학이 싹튼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지하]]가 본명 김영일 대신 '지하'라는 필명을 지은 곳이 바로 학림다방이다. 문학평론가 김현, <한국문학통사>의 조동일 등도 이곳을 드나들었다.] 이곳은 지금도 [[혜화역]] 3번 출구 앞에서 성업중. 아르코 예술극장 로비에 분점도 있다. 한편 [[연세대]]생들이 70~80년대에 애용했던 신촌 [[독수리다방]]도 유명했고, 90년대에는 커피전문점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면서 명맥을 유지해 나갔지만 프랜차이즈의 범람으로 인하여 2005년 결국 폐업했다...가 2013년에 애칭이던 독다방 이름으로 다시 부활했다. 원래 주인 할머니의 손자가 다시 영업을 하는 듯하다. 현재는 다시 독수리다방으로 이름을 환원하였다. 예로부터 한국영화계의 중심지인 [[충무로]]도 다방의 성지였다. 영화 배우들이나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 구상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할 때 다방만큼 좋은 곳도 없었기 때문. 원래 배우였다가 연출가로 전업한 [[남기남]]은, 스타다방에 갔다가 그곳에서 미남 배우인 [[최무룡]]을 보고는 '나같은 얼굴로는 배우하면 안 되겠구나.'라며 절망했다고.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몇 군데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카페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이었고, [[패스트푸드]] 체인점이나 멀티플렉스 극장 같은 문화시설은 물론, 무엇보다도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휴대폰이 대중화된 2000년대 초반 이전까지는 '''약속장소와 시간을 확실히 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고, 덕분에 다방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랜드마크]]는 종종 약속장소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특별한 케이스는 물론 보통의 2~30대들도 친구를 만나려면 다방으로 약속장소를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때문인지 아예 상호 자체가 '약속다방'인 곳도 꽤 많다. 지금도 다방에 혼자 들어가면 사람 만날 약속 있냐고 반드시 확인해보는 관례가 남아 있다. 당시의 다방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예로, 한국 최초의 [[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 씨가 은퇴 후 명동에 차린 "챔피언다방"을 들 수 있다. 당시 챔피언다방은 명동의 노른자위 땅에 있었는데[* 지금의 전진상 교육관 옆], 젊은이들의 약속장소로 꽤나 붐볐다. 그리고 당시 인스턴트 커피가 아닌 사이폰 커피를 팔았다.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고급 커피를 팔았던 셈.[* 요즘도 [[스타벅스 리저브]]에서나 마실 만한 커피다. 심지어 리저브에서도 사이폰은 1,000원 추가.] 하지만 이 때에도 퇴폐적인 다방이 아주 없던 건 아니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특수끽다'(特殊喫茶)[* 반대로 건전한 다방은 '순끽다'(純喫茶)로 불렀다. 참고로 현대 [[일본]]에서 '순끽다'(준킷사)는 [[술]]을 전혀 팔지 않는 카페란 뜻으로 쓰인다.]란 이름으로 변칙 영업을 하는 다방이 존재했으니 알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70~80년대에도[* 의외로 80년대까지는 바, 식당 같은 곳도 이런 [[퇴폐업소]]가 암암리에 존재했다. 전자의 경우 쉽게 말해 아예 [[매춘]]을 대놓고 하는 경우도 있었고, 후자의 경우 소위 말하는 [[요릿집|요정]]([[방석집]])의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60~70년대 호스티스물을 보면 이러한 곳의 묘사가 잘 나와있다.] 그냥 평범한 다방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레지들이 '''착석'''을 하고 치근덕대는 통에 황급히 빠져나왔다는 경험담을 가끔 들을 수 있었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정화되면서 그나마 이러한 문화가 외곽으로 밀려나서 다행인 거지[* 아직도 재개발이 안 된 도시의 변두리 지역이나 일부 시골에서는 티켓다방을 찾아 볼 수 있다.], 다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준 접대부 취급을 받았고, 사실상 천한 직업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 이러한 흐름이 아래에서 보이는 "티켓다방" 방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방하면 [[커피]]보다는 [[쌍화차]]가 떠오르는 사람도 많을 것인데 그 배경에는 [[5.16 군사정변]] 이후에 커피 판매 금지 같은 이상한 상황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외래품 판매 금지]]와 엮이면서 커피의 판매가 중단되더니, 이후에는 [[코코아]], [[홍차]] 등을 파는 것도 금지되었고 커피를 못파니 콩가루를 태워서 만든 '''콩피''' 같은 게 튀어나오기도 했다. >'''커피 마시게 [[이민]] 서둘러?''' > >진짜 [[커피]]를 팔다가 들켜 벌칙 휴업에 처해진 다방들이 있었다. >1달 남짓 쉬다가 문을 다시 연 후부턴 당국에 지극히 협조하는 태도로 나온다는 중론인데, 그 실증물은 '콩피'라고 하는 액체 - 본명은 물론 '[[네오]] 커피'니 '[[카피]]'니 하는 것들이지만 맛은 '네오'는커녕 '네오'의 [[사촌]]도 못된다는 게 민의 - 때문에 '콩피'라는 [[가명]]이 생긴 모양 - 다방가의 고객들은 그래도 이걸 문화수(?)로 알고 마시고 있으니 [[브라질]]의 농무상이 이 실정을 보았으면 [[이민]] 교섭보다 '커피' 염가수출안을 들고 나올 것만 같다. >13일 하오 최고회의 구내식당에서 엿들은 얘기지만 '골덴' 재건복을 입은 직원 수 명이 둘러앉아 하는 말이 걸작 - >"브라질 이민은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 >"글쎄, 요즘은 별로 떠들썩하진 않더라..." >"책방에선 [[브라질어]] 입문이란 책이 잘 팔린다더군..." >"하여튼 갈 바에야 하루라도 빨리 건너가서 커피 재배라도 해서..." >"고국에 보내달라! 이 말인가" >"그건 자네 사상과 흡사할 꺼야" >- 가명, '콩피'라는 그 괴물을 마시면서 이렇게 담교하는 관리들을 위해서도 브라질 이민 공작은 서둘러야 할 것 같지? >----- >[[1962년]] [[경향신문]].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kong.jpg|원문보기]])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가 [[계란]] 노른자 띄운 [[쌍화차]]로 대표되는 구식 다방 이미지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구식 이미지를 역으로 [[빈티지]]스럽게 이용해서 살아남은 다방들도 있다. [[인사동(종로구)|인사동]]이나 충무로 등지의 오래된 다방들은 일부러 초창기 인테리어나 소품들을 최대한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하얀 도자기로 된 재떨이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놋쇠주전자같은 골동품도 볼 수 있다. 가까운 곳은 배달도 해준다. [[https://m.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80083425#policyNews|다방에 관해 잘 정리된 기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