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팍스 로마나와 기독교 ==== ||[[파일:다마스쿠스 로마 개선문.jpg|width=620]]||[[파일:다마스쿠스 로마 상징.jpg|width=309]]|| || 직선 거리 중동부에 세워진 로마 개선문 유적 || 밥 키산의 후기 로마 상징 || 내전을 종식시킨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로마를 제정으로 전환시켰다. 그럼에도 관대한 동방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고, 시리아 일대에는 번국들과 자치 도시들이 별 간섭을 받지 않고 유지되었다. 한편 셀레우코스 조의 쇠퇴 이후 디마슈크와 시리아 남부 살카드, 보스라 사이에 위치한 트라코니티스 (라자트) 용암대지에는 도적떼가 들끓고 있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무리하게 파르티아와의 국경에 집중된 로마군을 투입하기 보다 일대를 현지 세력인 유대 국왕이자 벗인 [[헤로데 대왕]]에게 맡겼다. (기원전 23년) 20년 전 부친 안티파트로스의 암살 시에 디마슈크에 피신한 적이 있던 헤로데는 임무를 확실히 수행하였고, 도시는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마침 그의 서기관 역시 디마슈크 출신이었고, 헤롯은 그곳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오데온(극장)과 김나지움(체육관)을 세워주었다. 그 후 반세기 넘게 시리아 남부엔 로마 군단이 하나도 배치되지 않을 만큼 안정기를 구가하였다. 기원전후 무렵, 라틴식인 다마스쿠스로 명명된 도시는 셀레우코스 시대부터 이어져오던 농경지의 세분화와 팔미라, 두라 에우로포스 방면의 카라반 교역의 활성화를 완성하고 번영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의 패권하에 지중해 교역이 활발해지며 디마슈크는 동쪽에 더해 서쪽 티레와의 활발히 교류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는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때였다. 예루살렘과 불과 200km 떨어져 있었기에 도시에는 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중엔 사도 바울로는 개종시킨 성 아나니아스도 있었다. 서기 37년경, 기독교도들을 끝장내러 고향 [[타르수스]]를 떠나 유대로 향하던 독실한 유대교도 사울이 도중 눈이 멀어 디마슈크에 머물렀고, 예수의 계시로 그를 찾아낸[* 이때 디마슈크의 직선 거리가 성경에서 언급된다] 기독교도 아나니아스에 의해 눈이 치유된 후 세례를 받아 독실한 기독교도가 된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도 동문, 북문 사이의 나바테아 구역엔 하나니야 거리가 있고, 아나니아스의 옛 집은 성당으로 쓰인다. 개종하여 선교사가 된 바울로를 대다수 유대인들은 배신자로 간주하였다. 그들의 고발로 인해 당시 디마슈크에 머물던 바울로는 나바테아 국왕 [[아레타스 4세]][* 여담으로 현재 우마이야 대사원에 성지가 있는 세례자 요한(야흐야)이 그의 딸 파사엘리스와 결혼한 후 그녀를 내친 유대의 왕 헤로데 안티파트로스를 비난하다가 투옥되었다. 헤로데 안티파트로스가 조강지처를 내치고 제수 헤로디아와 결혼한 후 조카이자 의붓딸 [[살로메 3세]]가 춤을 추었는데,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묻자 요한의 머리라 답하여 처형된 것]의 행정관을 피해 야밤에 광주리를 타고 밥 키산 (동남문)의 창을 통해 도피해야 했다. (고린토 후서 11장) 신약의 이 대목을 통해 일각에선 서기 30년대에 디마슈크는 재차 나바테아의 지배를 받았다고 추측하기도 하나, 그외의 증거가 전무하므로 도시 동부 나바테아 구역에 상주하던 대사 정도였을 것이다. 그와 상관없이 디마슈크는 로마의 패권하에 번영을 이어가며 안티오크에 버금가는 시리아의 주요 도시로 성장하였다.[* 특히 카르도, 즉 원형 열주는 안티오키아보다 먼저 세워졌다. 중심 도로에 이러한 열주 건물을 세우는 것은 현지인들에게 로마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것 외에도 길거리 상인들이 태양빛을 피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팍스 로마나 기간 도시에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다면 66년, 유대 반란 때 군중이 유대에서 벌어진 로마인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시내의 유대인들을 헤로데 왕의 김나지움에 몰아넣어 학살을 자행한 사건이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10,500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파일:다마스쿠스 기독교.jpg|width=450]]||[[파일:다마스쿠스 로마 수도교.jpg|width=400]]|| || 성 바울로 성당으로 개조된 밥 키산 || 밥 자비야와 히자즈 역 사이, 알 카나와트에 남아있는 수도교 유구 || 73년, [[마사다]]의 함락과 함께 유대 반란이 진압된 후 로마는 레반트에 대한 간접 지배 정책을 폐하고 직접 지배에 나섰다. 같은해 (예루살렘 포위에 협조했음에도) 에메사의 왕정이 폐지되었고, 93년에는 이투레아가 합병되었다. 로마의 전성기를 이끈 [[트라야누스]] 황제는 106년, 1세기 내내 디마슈크 등 데카폴리스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키워가던 나바테아를 멸망시키고 요르단의 중심지를 [[보스라]]로 옮겨버렸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전쟁]]과 파르티아 전쟁 등 여러 군사 원정에 나섰는데, 그를 수행하던 건축가 아폴로도루스는 디마슈크 출생이었다. 트라야누스 원주와 개선문, 다뉴브 강의 다리 등을 설계한 그는 고향의 유피테르-하다드 신전의 확장 역시 주도하였다. 한편 바울로 외에 사도 토마스 역시 (인도로 떠나기 전까지) 디마슈크에 거주했고, 그들이 점차 기존 유대인들과 기타 주민들을 개종시키면서 밥 투마 (북문) 일대가 나중에 정교회 구역이 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다음 황제인 [[하드리아누스]]는 125년, 디마슈크를 코엘레 시리아의 메트로폴리스 (대도시)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222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콜로니아, 즉 식민도시로 승격되었다. 시리아 출신 왕비를 둔 세베루스의 후원으로 유피테르-하다드 신전 동문이 확장되었고 2중의 성벽이 둘러져 그 장엄함을 더하였다. 3-4세기 무렵 디마슈크의 대신전은 그 규모로 명성을 떨쳤고, 실제로도 당시 시리아에서 가장 큰 종교 건축물이었다. 그 무렵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전역에 퍼졌다. '동방의 눈'이라 도시를 묘사했던 [[율리아누스]] 황제의 다신교 복구 운동 때에 시내의 유대인들이 두 바실리카(성당)에 방화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일시적 반동이었다.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다른 종교 의식을 금하였고, 같은해 유피테르-하다드 신전은 성당으로 바뀌었다. 당시에는 특정 성인에게 봉헌되지 않았는데, 6세기 들어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매장되어 있다는 전설에 따라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실제로는 [[나블루스]] 인근에서 처형되었다] 성 요한 대성당은 동시에 다마스쿠스 주교좌 성당이었는데, 디마슈크의 대주교는 시리아에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다음가는 위치였다. 3-5세기 들어 로마 제국은 내란과 게르만, [[사산 제국]]의 침공으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시리아, 특히 디마슈크는 번영을 유지하였다. 특히 6-7세기 동로마-사산 제국 전쟁으로 팔미라를 통한 동방 교역이 사실상 중단되었음에도 남쪽 아라비아를 거친 새 교역로 역시 디마슈크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였기에 그러하였다. 서기 200년 무렵 완공된 디마슈크의 성벽이 더욱 강화된 것 외에 도시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약 680년간의 로마 지배기가 도시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기존의 아람, 헬레니즘기의 시가지가 하나로 합쳐져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그 유구는 5m나 되는 두터운 지층 밑에 매장되어 있지만, 그 구조는 현재까지도 구도심의 중추이며 일부는 여전히 사람들이 이용하거나 지나다니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