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새로운 시대 ==== || [[파일:다마스쿠스 로마.png|width=680]] || [[파일:다마스쿠스 신전.jpg|width=374]] || || 로마 지배기의 도시. 그리스식 시가지가 남쪽 아람인 구역 등으로 확대되었고, 상징적인 직선 거리가 놓였다||유피테르 신전의 유구 || '마지막 셀레우코스'로 평가되는 안티오코스 12세의 죽음 후, 디마슈크 시민들은 약탈로 악명이 높은 서남쪽의 이트레아로부터 보호를 청하며 아레타스 3세를 군주로 받아들였다. 아레타스 3세는 스스로 셀레우코스 조의 후계자를 칭하였고, 디마슈크에서 발행된 동전에도 고유어가 아닌 그리스어를 사용해 헬라화된 주민들과의 동질감을 보이고자 하였다. 나바테아 인들은 기존 시가지의 동쪽에 자리잡았고, 이때 디마슈크는 후에 데카폴리스로 묶이게 되는 요르단 일대의 도시들과 같은 생활권이 되었다. 하지만 나바테아의 지배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거듭된 내분에 절망한 안티오크 시민들의 초청으로 남하한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가 기원전 72년 디마슈크를 점령한 것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 [[폰투스]]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 나선 로마의 [[루쿨루스]]는 기원전 69년 티그라네스에게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해 아르메니아 군은 디마슈크에서 철수하며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그 후 약 3년간 무주공산으로 남았던 시리아에 기원전 66년, 루쿨루스의 후임으로 부임한 [[폼페이우스]]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아르메니아 본토로 진격하는 동시에 루키우스 롤리우스와 메텔루스 네포스를 시리아로 보내어 우선 디마슈크를 접수하게 하였다. 시리아에서 안티오크보다 우선 순위였던 점은 최근 한세기간 높아진 디마슈크의 위상을 상징한다. 이후 부관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를 보내 나바테아의 재점령을 방지하게 하였다. 폼페이우스 본인은 안티오크에서 연명하던 셀레우코스 조를 완전히 무너뜨린 후 기원전 63년 디마슈크에 당도했다. 그곳에서 시리아 각지와 유대, 이집트 등지의 사절을 접견한 폼페이우스는 시리아에 대한 느슨한 지배를 구축한 후 이듬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셀레우코스 조의 테라폴리스로 대표되는 북부만이 직접 지배가 확립되었고, 디마슈크와 에메사 등의 도시들은 로마의 헤게모니 하에서 상당한 자치를 부여받았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1차 내전을 지나 기원전 37년, 삼두정치의 일원으로써 동부를 맡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였다. 3년 후 그는 연인의 숙원이던 디마슈크를 포함한 시리아 남부를 무려 150년 만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할양해주었다. 비록 둘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의 명의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지극히 명목상이었지만 본국의 여론이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기울게 하기엔 충분하였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3년까지 수차례 파르티아 및 아르메니아 원정에 나섰는데, 디마슈크가 그의 주요 거점이었다. 하지만 이내 발발한 2차 내전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대패로 귀결되었고, 곧바로 시리아의 도시들은 옥타비아누스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듬해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를 접수하기 위해 육로로 진군하였고, 디마슈크를 지날 때에 주민들은 그를 환영하고 충성을 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