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헬레니즘 (시리아 전쟁) ==== 막대한 전리품을 얻은 파르메니온은 아므리트에서 휴식을 취하던 알렉산드로스와 합류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멤논을 디마슈크 총독으로 봉하고 그리스식 화폐 주조를 명하며 헬라화를 시작하였다. 그후 남하를 이어가며 이집트 원정을 완수한 알렉산드로스는 메소포타미아 방면으로 북상하며 해안로 대신 디마슈크를 통한 내륙로를 이용하였다. 이때 시리아 사트라프의 지배자로 아스클레피오도로스가 임명되었다. (기원전 331년) 그리고 10년 후 대왕은 시신이 되어 운구 행렬과 디마슈크로 돌아왔고, 거기서부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시신을 [[알렉산드리아]]로 운송하였다. 그 후 디마슈크를 포함한 시리아 남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령이 되었는데, 잠시 [[안티고노스]]에게 빼앗겼지만 그가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격파당하자 회복되었다. 한편 북부 시리아를 장악한 셀레우코스 조는 남부를 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조와 한세기간 지속된 [[시리아 전쟁]]을 벌였다. 1차 시리아 전쟁은 주로 해안가에서 벌어졌다. 승리를 거둔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디마슈크를 왕비의 이름을 따 '아르시노이'로 개칭하였다. 기원전 260년에 벌어진 2차 전쟁에선 셀레우코스 조가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와 연합해 우세하였다. 따라서 253년의 휴전 조약에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딸 베레니케를 셀레우코스 군주 안티오코스 2세에게 결혼시키며 그 [[지참금]]으로 디마슈크를 포함한 코엘레 시리아를 할양하였다. 다만 불과 7년 후인 기원전 246년에 벌어진 3차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대승을 거두었고, 5년 후 체결된 강화에서 시리아 해안 전부와 코엘레 시리아(시리아 협곡)를 되찾았다. 기원전 219년, 셀레우코스 조의 야심찬 군주 [[안티오코스 3세]]는 4차 전쟁을 일으켜 시리아 해안을 수복하고 더 나아가 가나안까지 점령했다. 다만 2년 후 [[라피아 전투]]에서 이집트 군의 분전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조는 디마슈크 일대까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만 전쟁의 대가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조는 시리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집트 본토는 이전과 같은 중앙 집권적 통치가 이루어진 반면, 디마슈크 일대는 일종의 비무장지대로 방치되었다. 지명도 곧 디마슈크의 그리스어 발음인 '다마스코스'로 굳어졌고, 아람인 정체성이 유지되었다. 한편 동방 원정을 통해 전성기 셀레우코스 조의 강역을 회복한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는 기원전 202년 재차 마케도니아와 동맹해 5차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신속히 시리아 전부를 점령하였고, 비록 이집트 장수 스코파스의 반격으로 잠시 밀려나긴 했지만 결국 기원전 198년 시리아와 가나안을 석권하였다. 3년 후 맺어진 강화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조는 그의 점령지를 인정하였고, 이로써 디마슈크는 셀레우코스 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다만 셀레우코스 조 역시 수도 [[안티오크]]를 포함한 테라폴리스[* 안티오크, 셀레우키아, [[라타키아]], [[아파메아]]] 및 베로이아 (할랍) 등 북부에 치중하였다.[* 그 밖에 라리사 ([[샤이자르]], 에피파네이아 (하마), 두라 에우로포스 등의 도시들이 개발되었고 코엘레 시리아인 홈스 ~ 디마슈크 일대는 방치되었다] 따라서 디마슈크는 한동안 재차 소외되어 있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