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이합집산의 연속 ====== 1202년 알 아딜은 알레포의 앗 자히르마저 복속시키며 아이유브 제국을 통합하였다. 이듬해부터 그는 디마슈크 시타델 증축에 나섰고, 시리아 각지의 제후들도 참가한 끝에 1216년 완공되었다. 십자군과 휴전을 이어가던 알 아딜은 1217년 5차 십자군이 당도하자 요르단 북쪽 아즐룬으로 나아가 디마슈크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비록 팔레스타인의 헝가리 십자군은 곧 귀환했지만 이듬해 독일 주도의 십자군이 이집트를 공격하였다. 다미에타 공방전이 한창이던 1218년 8월, 알 아딜은 그 외곽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급보에 쓰러져 사망하였다. 1202년에 이미 분할해 놓은대로 세 아들인 알 카밀 무함마드, 알 무아잠 이사, 알 아슈라프 무사가 각각 이집트, 디마슈크, 자지라를 계승하였다. 다만 술탄위가 이집트로 옮겨진 탓에 디마슈크는 반세기만에 제국의 수도 자리를 잃었다. 알 무아잠은 십자군에 맞서는 알 카밀을 성실히 보좌하였다. 1219년 이집트 군부의 반란 시에도 직접 구원에 나섰다. 그해 말엽 결국 다미에타가 함락되자 시리아로 돌아간 알 무아잠은 1220년 카이사레아를 점령하고 아틀리트를 포위하는 등 십자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다가 11월에야 디마슈크로 회군하였다. 1221년 7월 알 카밀의 요청에 알 무아잠과 무사는 이집트로 향하였고, 디마슈크 군대는 십자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만수라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 다만 십자군이 철수한 후 알 무아잠은 형제들과 대립하였고, 1226년에는 [[호라즘 제국]]의 잘랄 웃 딘에 복속하고 자지라 공격을 부탁하기도 하하였다. 한편 1227년 알 카밀은 십자군과의 평화를 위해 예루살렘 양도를 약속하였는데 실효 지배자인 알 무아잠은 반발하였고, 이에 알 카밀은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접촉하였다. 그러던 그해 11월 알 무아잠이 사망하고 어린 아들 앗 나시르 다우드가 계승하자 알 카밀은 1228년 8월 팔레스타인을 정복하였다. 앗 나시르는 숙부 무사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같은달 그는 디마슈크에 당도하였다. >최근 새롭게 닥쳐온 재앙에 우리들의 가슴은 찢어질 듯 합니다. 무슬림 순례자들은 더이상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습니다. 쿠란의 구절 또한 더이상 마드라사에게 울려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오늘보다 수치스러운 날이 또 있었단 말입니까! > >ㅡ 다마스쿠스의 이맘 시브트의 연설 1229년, 십자군에 예루살렘을 내어주고 10년 휴젼을 맺은 알 카밀은 시리아로 관심을 돌렸다. 한편 예루살렘 할양 소식에 각지의 무슬림들은 분노하였다. 특히 디마슈크의 여론은 폭발하였고 앗 나시르는 설교자들을 이용해 알 카밀에 대한 적개감을 조성하였다. 이에 알 카밀은 무사를 구슬려 자신에게 복속하는 대가로 그를 디마슈크를 준다는 밀약을 맺었다. 그해 3월, 프리드리히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무렵 무사는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다. 포위군은 시내로 향하는 수자원을 끊으려 하였으나 수비대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알 카밀은 4월 부관 파크르 앗 딘을 포위망에 합류시켰고, 다음달 십자군이 떠나기가 무섭게 알 카밀은 자신도 합류하였다. 여론의 지지와 함께 버티던 앗 나시르는 6월 14일, 술탄의 진영을 방문해 협상에 나섰고 이틀 후 알 카밀과 만났다. 11일 후 앗 나시르는 항복하여 점령되지 않은 케라크로 향하였고 무사가 총독으로 봉해졌다. 1230년 무사는 알 카밀과 함께 자지라를 위협하던 잘랄 웃 딘을 격파하였고, 자지라를 술탄에게 내주는 대가로 바알벡을 얻었다. 이듬해 3월 디마슈크로 돌아온 무사는 곧 알 카밀의 초청으로 카이로로 향하였고, 1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이후로도 무사는 1232년 [[아르투크 왕조]], 1235년 [[룸 셀주크]]에 대한 원정 등에서 술탄을 동행하였다. 다만 후자의 원정 중 몽골군이 이라크 북부에 나타나자 후퇴하였는데, 이후 알 카밀이 몽골의 동정을 살핀다며 1236년이 지나도록 디마슈크에 계속 머물렀다. 의심이 불안으로 바뀐 무사는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 및 룸 셀주크의 술탄과 연합해 술탄에 맞서려 하였는데 1237년 봄 후자가 사망하고 본인 역시 병에 걸리며 무산되었다. 그해 8월 27일 무사가 사망하자 동생 앗 살리흐 이스마일이 계승하였는데, 알 카밀은 무단 점거라며 반발하며 11월 10일 카라크의 앗 나시르와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다. 이스마일은 시리아 각지의 제후들에게 도움을 청하였지만 오직 홈스만이 소수의 병력을 파견하였고, 그마저도 격파되었다.[* 겨우 200명이었고 50명이 포로로 잡히자 알 카밀은 배신자라 욕하며 교수형에 처하였다] 알 카밀은 본영을 남문에 세우고 앗 나시르는 서문, 나머지 병력은 북문에 배치되었다. 12월 20일, 마침내 포위군은 전면 공세에 나섰고 앗 나시르가 서문을 거의 돌파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전공을 넘기기 싫었던 (혹은 약탈을 우려했던) 술탄은 파크르 앗 딘을 보내 공격을 중단시켰다. 이어진 공성전으로 디마슈크 교외는 잿더미가 되었고 시내의 물가가 폭등하였다. 이로써 여론이 악화되자 이스마일은 연말에 휴전을 청하였고 1238년 1월 7일에 도시를 떠나 바알벡의 영지로 향하였다. 이후 알 카밀은 디마슈크에 머물렀는데, 그해 3월 8일 병사하였다. 장남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자지라, 차남 알 아딜 2세가 이집트를 계승하였고 앗 나시르는 권력 공백을 틈타 9년만에 디마슈크를 장악하였다. 다만 이듬해 1월, 호라즘 용병과 남하한 아이유브에게 도시를 내주었다. 1239년 9월, 바알벡으로 물러났던 이스마일은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는 아이유브를 돕는 척하며 홈스 군대와 함께 디마슈크를 기습 점령하였다. 졸지에 근거지를 잃은 아이유브는 케라크의 앗 나시르에게 의탁하려 하였으나 결국 그의 포로가 되었다. 그해 11월 앗 나시르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이슬람권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같은 시기 아크레에 모이던 귀족 십자군은 아슈켈론을 거쳐 디마슈크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집트 군에게 패하고 아크레로 철수하였다. 한편 이집트의 알 아딜 2세와 협상이 결렬된 후 앗 나시르는 아이유브를 석방, 각각 디마슈크와 이집트를 점령하는데 있어 상호 협조한다는 조건으로 동맹하였다. 그러나 1240년 6월 이집트를 정복하고 술탄으로 등극한 아이유브는 약속을 파기하고 이스마일의 디마슈크 영유를 승인하였다. 한편 그해 7월 이스마일은 십자군과 동맹을 맺었고 군사 원조를 대가로 갈릴리 북부를 할양하였다. 이에 대사원의 설교자 이즈 앗 딘 압둘 살람이 이스마일을 비난하며 예배 기도문에 그를 언급하길 거부하다가 결국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정확힌 체포되고 석방된 후 망명] 한편 이스마일의 이러한 배려에도 십자군은 템플기사단 등 현지 제후들의 반발에도 술탄 아이유브와 협상하였다. (1241년) 한편 이스마일은 쿠트바에서 술탄으로 아이유브 대신 룸 술탄을 언급하게 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이스마일과 동맹했던 앗 나시르는 그가 사파드 성채의 무슬림 봉기를 돕기는 커녕 십자군에게 알려 학살을 도운 것에 경악하여 그해 6월 술탄과 동맹하였다. 그후 이스마일은 앗 나시르를 격파하고 십자군과 이집트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가자에서 술탄의 군대에 막혀 철수하였다. 이 시기 법학자 알 술라미가 십자군과 연합해 술탄과 싸우는 그를 비판하다가 투옥되었다. 1242년 아이유브는 시리아 원정을 시도했으나 군대가 디마슈크로 망명해버렸다. 십자군을 괴롭히던 앗 나시르도 이듬해 예루살렘을 할양하였다. 한편 1243년 십자군은 제국파와 이벨린 가문 사이의 내전을 벌였다. 그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이스마일은 그해 여름 아이유브와 화해, 그를 술탄으로 인정하였다. 9월 11일 디마슈크의 금요 예배에서는 아이유브가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봄 아이유브가 베르케 칸 휘하의 호라즘 인들을 초청하자 이스마일은 재차 술탄을 적대하였다. 1244년 6월 호라즘 인들은 디마슈크를 공격하였고, 이스마일은 반격에 나섰지만 곧 성내로 철수하였다. 가자에 모이던 군대도 디마슈크로 철수하였고, 이로써 시리아 제후들 및 십자군을 포함한 이집트 원정은 무산되었다. 다음달 호라즘 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이스마일과 앗 나시르가 개입하여 십자군 수비대의 안전 철수를 확보해주었다. 그 무렵 아이유브는 아들 우마르가 디마슈크에서 옥사했다는 소식에 분노하였고 드디어 이집트-호라즘과 시리아-십자군이 [[라 포르비에 전투]]에서 격돌하였다. (1244년 10월) 하틴 전투 이후 최대의 회전에서 이스마일은 호라즘 군에게 밀리자 일찍 도주하였고, 남은 십자군은 포위되어 대패하였다. 이듬해에 술탄은 재상 무인 앗 딘에게 시리아 정복을 맡겼다. 그는 1245년 4월 디마슈크를 포위하였고 동맹인 호라즘 인들은 도시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포위군은 투석기로 매일 폭격을 가하였는데, 그와중에 우마이야 대사원의 동쪽 미나렛이 맞아 파괴되는 피해가 있었다. 그후 이스마일이 인근 수로의 둑을 터트려 홍수를 내자 무인 앗 딘은 한발 물러나 봉쇄에 치중하였다. 이스마일은 6월에 알 아딜의 궁전을 포함한 디마슈크 북부 구역을 파괴하여 소개시켰다. 다만 포위가 장기화되며 식량 부족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그해 9월 이스마일은 와지르 아민 앗 다울라를 무인 앗 딘에게 보내 협상하였고, 다음달 바알벡과 보스라 영지를 유지하는 대가로 항복하였다. 1245년 10월 9일 무인 앗 딘은 디마슈크에 입성하였다. 이스마일은 그 전날 도시를 빠져나갔다. 1246년 2월, 술탄은 다른 장군 후삼 앗 딘을 총독으로 지명하였고 무인 앗 딘은 급사하였다. 이스마일을 추격해 체포하라는 왕명을 거절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한편 무인 앗 딘의 죽음과 함께 호라즘 인들에게 시리아 남부와 팔레스타인에 영지를 주겠다는 약속도 파기되었고, 이에 분노한 호라즘 군대는 다음달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다. 그들과 동맹한 앗 나시르는 예루살렘을 접수하였고, 이스마일은 4월 호라즘 군대에 합류하였다. 그러자 술탄은 이스마일의 옛 동맹인 홈스의 알 만수르에게 디마슈크 총독위를 제안해 포섭하였고, 그는 호라즘을 경계하던 알레포의 병력과 남하하였다. 호라즘 인들도 포위를 풀고 북상하여 양측은 알 카삽 전투에서 격돌했는데, 호라즘 군은 베르케 칸이 전사하는 등 대패하였다. 다만 그 한달 후 알 만수르는 디마슈크에서 카이로 행을 준비하던 중 사망하였고 후삼 앗 딘이 그대로 총독위를 유지하였다. 이후 이스마일은 도주하였고 바알벡이 항복하였다. 대세가 정해지자 술탄 아이유브는 시리아 친정을 계획하였다. 디마슈크 총독 후삼 앗 딘은 소환되어 술탄이 부재하는 동안 카이로를 맡았고, 그동안 디마슈크는 자말 앗 딘 마트루가 맡았다. 아이유브의 선봉장 파크르 앗 딘은 1246년 말까지 예루살렘, 나블루스, 보스라를 점령하였는데 연말에 와병하였다. 그러자 1247년 3월 술탄은 직접 시리아로 향하였다. 이에 살카드, 살라미야, 바니아스 등이 항복하였고 4월 7일 아이유브는 7년만에 디마슈크에 입성하였다. 다만 술탄은 오래 머물지 않고 회복한 파크르 앗 딘에게 시리아를 맡긴 후 회군하였다. 파크르 앗 딘은 십자군으로부터 티베리아스, 아슈켈론을 점령였다. 술탄의 시리아 통합을 경계한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는 망명해온 이스마일과 홈스를 포위하였다. (1248년 5월) 이에 아이유브는 재차 친정을 결심하였지만 와병하였고, 결국 홈스는 항복하였다. 1248년 가을, 아이유브는 가마를 타고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이후 홈스로 파견된 후삼 앗 딘과 파크르 앗 딘은 도시를 봉쇄한 후 디마슈크 일대의 농민들을 징발해 투석기를 운송하였다. 그 무렵 7차 십자군이 키프로스에 당도했다는 소식에 알레포를 제외한 시리아의 제후들은 아이유브에 충성을 서약하였다. 한편 포위가 장기화되던 1249년 3월 칼리파 [[알 무스타심]]이 보낸 사절단의 설득으로 아이유브는 포위를 거두고 4월 19일 디마슈크를 떠나 회군하였다. 6월에 그가 이집트에 당도할 무렵 7차 십자군 역시 다미에타를 무혈 점령하고 남하하였다. 앗 나시르의 카라크가 술탄군에게 점령된 것이 유일한 희소식이었다. 십자군과 아이유브 군이 만수라에서 대치하던 1249년 11월 아이유브는 사망하였다. 자지라에서 남하한 그의 아들 투란샤는 1250년 1월 5일 디마슈크에 입성하였고 총독 자말 앗 딘에 의해 술탄으로 선포되었다. 투란샤는 장교 및 귀족들에게 재물을 나눠주고 23일 이집트로 향하여 한달 후 만수라에 당도하였다. 투란샤가 이집트에 당도했을 당시 이미 7차 십자군은 맘루크 군에게 대패한 상태였다. 하지만 투란샤는 승리를 이끈 바흐리 맘루크 대신 자신의 친위 세력을 등용하였고, 불만을 품은 그들에게 5월 암살당하였다. 그후 맘루크 군부는 섭정이던 후궁 출신의 샤자르 알 두르를 술타나로 추대하고 디마슈크에 카팁 (설교자) 아실 앗 딘 알 이드리시를 파견해 충성을 얻어내려 했으나 총독 자말 앗 딘 이븐 야그무르는 거부하였다. 다만 카라크의 경우와 달리 자말 앗 딘이 아이유브 왕공을 추대하지 않자 불만을 품은 쿠르드계 맘루크들이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와 결탁하였다. 이에 신속히 남하한 유수프는 1250년 7월 10일 밥 앗 사기르 (남문)을 통해 디마슈크에 입성하였고 시타델의 자말 앗 딘도 곧 항복하였다. 이 소식에 맘루크 군부는 디마슈크 원정을 보류하였고 아이유브 왕족 중 6세의 알 아슈라프 무사를 추대하고 맘루크 중에서 아이바크를 그 섭정으로 선포해 맞섰다. 가을까지 바알벡, 카라크 등 시리아를 통합한 유수프는 연말 무렵 가자에 연합군을 집결시켰다. 그러나 1251년 2월, 카이로 근방에서 벌어진 압바사 전투는 유수프의 튀르크 맘루크들이 동족 편으로 이탈하며 맘루크 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후 아이바크는 십자군과 동맹하여 시리아를 공격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실현하지는 않았다. 결국 1253년 4월 칼리파 알 무스타심의 중재로 아이바크와 유수프는 나블루스를 경계로 휴전을 맺었다. 유수프는 자신의 동맹 제안을 거절한 십자군에 대한 보복으로 야파, 시돈 등지를 습격한 후 디마슈크로 돌아갔다. 다만 이듬해 그는 십자군과 2년 6개월의 휴전을 맺었다. 같은해 아이바크는 스스로 술탄이 되며 허울 뿐이던 아이유브 술탄국을 멸하였고 1255년에는 십자군과 10년 휴전을 맺었다. 한편 아이바크의 숙청으로 바이바르스 휘하 바흐리 맘루크가 유수프에게 망명하였는데 유수프는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특히 1257년 아이바크가 암살당했음에도 유수프는 칼리파로부터 술탄 칭호를 얻어내는 데에만 치중하였고, 이에 실망한 바이바르스는 그해 가을 디마슈크를 떠나 케라크의 우스만에게 의탁하였다. 한편 1258년 몽골군은 이라크 공략에 나섰다. 이에 바그다드의 칼리파와 마야파리킨 영주 등이 유수프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는 약속만 하고 제대로 돕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시리아 남부를 약탈하던 바이바르스와 싸웠고, 바그다드가 결국 함락되었을 때에도 원군은 여전히 '준비 중'이었다. 1259년 초엽, 유수프는 디마슈크 동쪽 구타에 주둔하며 바이바르스에 맞섰다. 후자의 공격으로 술탄의 막사가 기습당하고 디마슈크에선 일단의 혼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유수프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바이바르스는 재차 그에게 복속하였다. 한편 몽골 왕공 훌라구와 접촉하던 유수프는 그의 출두 명령에 아들을 대신 보냈는데, 만족하지 않은 훌라구는 시리아 원정을 결심하였다. 1259년 9월, 훌라구는 타브리즈에서 시리아를 향해 남하하였다. 이에 유수프는 이집트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청하였으나 당시 쿠투즈의 쿠데타로 맘루크 측은 제대로 답변하지 않았다. 한편 유수프는 시리아 사막의 압바스 왕자 아흐마드 (후의 [[알 하킴 1세]])를 초청해 약 5세기만에 디마슈크에서 칼리파로 세우려까지 하였는데 몽골군의 침공으로 좌절되었다. 몽골군이 카부르 강을 지나 알레포로 접근하자 유수프는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대군을 편성하여 디마슈크 북쪽 4km 지점의 알 비르자에 주둔하며 훌라구를 기다렸다. 다만 유수프는 강경론과 신중론 사이에서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였고, 그 나약함을 멸시한 바이바르스는 이듬해 1월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바흐리 맘루크들은 디마슈크 부근 정원에서 숙영하던 유수프를 습격하였는데 그는 용케도 시타델로 도주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바이바르스는 유수프의 동생 앗 자히르 가지를 술탄으로 옹립하곤 가자로 도주하였다. 충격을 입은 유수프는 바이바르스에게 디마슈크를 빼앗길까봐 몽골군에게 포위된 알레포로 출정하지 않았고, 1월 24일 도시는 함락되었다. 이 소식에 유수프는 시타델에만 수비대를 둔 채로 디마슈크를 떠나 철수하였다. (1월 31일 ) 이에 주민들은 성벽 위로 몰려와 울부짖거나 무책임한 지도자를 저주하였다. 일부 기독교도들은 혼란기를 틈타 도시를 떠나 십자군령 티레로 이주하였다. 얼마 후 가자에 당도한 유수프는 앗 자히르 가지와 화해하고 군세를 합쳤다. 다만 바이바르스는 곧 쿠투즈의 사면을 받아 이집트로 향하였다. 유수프가 떠난 직후 몽골군 분견대가 디마슈크 외곽 올리브 농장에 접근하였고 수비대를 기습해 격파하였다. 그리고 알 비르자에 있던 몽골 사절단은 1260년 2월 4일에 디마슈크에 입성하였다. 유수프를 따르지 않고 남아있던 관료 자인 앗 딘 알 하피지는 알레포의 훌라구에게 카디 사드르 앗 딘 이븐 사니 앗 다울라 등의 항복 사절단을 보내었다. 이에 훌라구는 부관 키토부카를 파견하였고, 이들은 안티오크공 보에몽 6세 및 아르메니아 국왕 하이톤 1세 등과 함께 디마슈크에 입성하였다. (1260년 2월 14일) 우마이야 대사원은 성당으로 개조되었고 무슬림 성지에서는 술 잔치가 벌어졌다. 한편 몇주 후 키토부카가 유수프 추격을 위해 남하하자 시타델의 병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왈트 (지휘관) 바드르 앗 딘 무함마드 이븐 칼리자르와 나킵 알 칼라 (성주) 자말 앗 딘 알 사이라피가 가자에서 파견된 유수프의 은밀한 지시 받고 봉기한 것] 3월 중순에 복귀한 키토부카는 시타델을 포위하였고, 20일에는 주민들을 동원해 공격하기도 하였다. 수비대가 버텨내자 키토부카는 4월 25일 20여대의 투석기를 건조하고 시내 건물로부터 포탄을 징발하였다. 그러자 더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수비대는 3일 후 항복하였다. 키토부카는 수비대를 살려주었으나 시타델의 성벽 일부 및 성탑과 여장 등을 허물어 무력화시켰다. 한편 가족들을 이집트로 보낸 후 요르단으로 북상한 유수프는 몽골군에 항복하였고, 아즐룬 등지를 항복시킨 후 6월 17일 포로 신세로 디마슈크에 돌아왔다. 8일 후 그는 다른 아이유브 왕공들과 타브리즈의 훌라구에게 보내졌다. 그러던 1260년 8월, 맘루크 술탄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대군을 이끌고 가자로 북상하였다. 이에 키토부카는 전군을 모아 디마슈크에서 남하하였는데, 수비대 없이 남겨진 도시의 주민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이어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키토부카가 전사하며 몽골군이 대패하자 디마슈크의 주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이틀간 몽골 부역자들과 몽골 치하에서 우대받던 기독교도들을 공격하였다. 밥 투마 (북문)와 밥 샤르키 (동문) 사이의 기독교 구역은 약탈되었고 성 마리아 성당이 전소되었다. 9월 7일 자말 앗 딘 무함마디의 맘루크 군이 입성한 후에야 질서가 회복되었다. 다음날 도시 근교에서 이드 알 피트르를 지낸 쿠투즈는 9월 10일 디마슈크에 개선한 후 시타델에 머물렀다. 쿠투즈는 디마슈크로 찾아온 베두인 부족장 이사 이븐 무한나를 아미르 알 아랍으로 봉하는 등 시리아 각지의 제후들을 분봉한 후 카이로로 회군하였다. 다만 그 도중에 바이바르스가 쿠투즈를 살해하고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그러자 그해 가을 디마슈크 총독 산자르 알 할라비가 술탄 알 무자히드를 칭하며 반란하였다. 디마슈크의 아미르들 중 알라 앗 딘 아이디긴 등은 바이바르스를 지지하며 도시를 떠났고 산자르가 보낸 추격대를 격파하였다. 산자르는 알레포와 하마에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1261년 1월 17일, 맘루크 군대의 접근에 산자르는 출정하여 디마슈크 외곽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그는 시타델에서 항전하였는데 아미르들은 바이바르스가 보낸 뇌물과 예복에 전향하였다. 비록 여론은 산자르를 지지했지만 포위가 시작되자 곧 항복하였다. 그 틈에 십자군이 하우란을 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그해 봄에 두 압바스 왕공들이 베두인들과 디마슈크로 향하였다. 총독 타이바르스는 그들의 카이로 행을 주선하였고, 먼저 도착한 아불 카심 아흐마드가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2세]]로 즉위하며 압바스 왕조가 부활하였다.1261년 9월 바이바르스는 칼리파와 디마슈크에 당도하였다. 10월 11일 알 무스탄시르는 3백의 기병과 바그다드 수복을 위해 출정하였다. 도움을 약속했던 바이바르스는 11월 12일 디마슈크를 떠나 회군하였다. 1266년 6월 바이바르스가 십자군 성채 사파드를 포위할 당시 디마슈크의 투석기가 파견되었다. 다음달 사파드를 함락한 바이바르스는 디마슈크 근처에서 부관 칼라운 휘하 아르메니아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그후 디마슈크와 홈스 사이의 기독교도 마을 카라에서 학살을 자행한 바이바르스는 칼라운과 합류하여 9월 디마슈크에 개선하였다. 그리고 10월 3일 이집트로 회군하였다. 1268년 안티오크를 함락한 바이바르스는 6월 9일 디마슈크에 개선하였다. 이후 십자군 사절과 10년의 휴전에 합의하였으나 그 범위를 놓고 추후 갈등이 일며 결렬되었다. 이듬해 가을 몽골군이 시리아 북부에 나타났는데 12월 9일 바이바르스가 디마슈크에 당도하자 철수하였다. 다만 며칠만 머물렀고 십자군과 대결한 후 이집트로 돌아갔다. 1271년 8차 십자군과 맞서던 바이바르스는 6월 12일 디마슈크에 당도하여 상황을 살피다 적의 움직임이 없자 다음달 회군하였다. 그 직후 십자군이 습격해오자 9월 20일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같은 시기 몽골군 역시 알레포를 지나 남하하자 디마슈크에선 혼란이 일어 일부 주민들은 카이로로 피신하였다. 11월 9일 이집트에서 원군이 당도하자 3일 후 바이바르스는 알레포로 북상하였는고,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바이바르스 역시 이듬해 1월 회군하였다. 1272년 십자군과 10년의 휴전을 체결한 바이바르스는 5월 8일 디마슈크에서 몽골 사절단을 접견하고 답하였다. 그후로도 한차례 더 사절을 주고받았으나 효과는 없었고, 8월 비밀리에 카이로로 향했던 바이바르스는 카이로에서 3일만에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11월 28일, 그는 디마슈크를 떠나 북상하여 알 비라를 포위한 몽골군을 격퇴한 후 12월 26일 도시를 거쳐 귀환하였다. 1273년 여름 몽골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에 바이바르스는 재차 디마슈크로 북상하였는데 이번에도 몽골군이 철수하자 그 역시 회군하였다. 1275년 2월 재차 디마슈크에 당도한 바이바르스는 3월 6일 아르메니아 원정에 나섰다. 4월 말 디마슈크로 돌아온 바이바르스는 12월 8일 몽골군이 재차 알 비라로 접근하자 재차 출정했는데 역시 몽골군은 그 소식에 철수하였다. 바이바르스 역시 홈스에까지 북상했다가 회군하였다. 1277년 바이바르스는 아나톨리아로 원정하여 몽골-룸 연합군을 격파하고 디마슈크로 개선하였으나 7월 1일 급사하였다. 두 아들 바라카와 솔라미쉬는 연달아 폐위되고 1279년 말 원로 아미르 쿠투즈가 술탄이 되었다. 1275년부터 디마슈크 총독이던 순쿠르 알 아쉬카르는 1280년 3월 바라카가 의문사하자 다음달 스스로 술탄 알 카밀이라 선포하며 반란하였다. 알래포, 하마, 베두인 족장 시사 등이 그를 지지하였다. 5월 순쿠르는 가자로 진군했으나 이집트 군에 패하였고, 칼라운은 바이바르스 즉위 시에 반란을 일으켰던 산자르를 이번에는 토벌군으로 파견하였다. 6월 디마슈크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초반에 알레포, 하마 군대가 이탈하고 베두인 부대가 사막으로 도주하며 패배한 순쿠르는 라흐바로 향했는데 입성하지 못하자 사흐윤 (살라딘 성채)에 틀어박혀 몽골에 도움을 청하였다. 1280년 10월 몽골군이 알레포를 점령하자 그 난민들은 디마슈크로 모여들었다. 다만 칼라운이 북상하자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이듬해 재차 출정한 칼라운은 십자군과 10년 10개월 10주 10일의 휴전을 체결한 후 5월 10일 디마슈크에 당도하였다. 다음달 순쿠르는 안티오크와 아파메아의 영지를 대가로 항복하였다. 1281년 가을 몽골군이 알레포를 지나 이번엔 남하하자 10월 칼라운은 디마슈크 외곽에 군대를 소집하였다. 다만 제후들의 요청에 따라 전장은 홈스로 변경되었고 이어진 전투에서 초반에 맘루크 군은 일부가 디마슈크를 거쳐 이집트까지 도주할만큼 밀렸지만 반격에 성공하여 대승하였고, 11월 16일 칼라운은 디마슈크에 개선하였다. 12월 7일에는 디마슈크로 온 몽골군 탈영병들이 라흐바 부근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바카 칸의 철수 소식을 알렸다. 1287년 라타키야를 점령한 칼라운은 1289년 초엽 마침내 트리폴리 정복에 나서 북상하였다. 3월 14일 4만 대군과 함께 디마슈크에서 출정한 카라운은 다음달 트리폴리를 함락한 후 6월 6일 도시에 개선하였다. 디마슈크를 포함한 시리아 각지의 도시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1289년 7월 칼라운은 십자군과 10년 10개월 10일의 휴전을 체결하며 아크레와 디마슈크 간의 자유 무역에 합의하였다. 이로써 도시의 상인들은 몽골의 방해로 동방 무역이 단절되었던 것으로 인한 손실을 어느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존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290년 8월 아크레에 막 당도한 이탈리아 출신의 기사들이 전쟁이 없는 것에 실망하여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무슬림 상인이 기독교도 여성을 유혹했다는 풍문에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인근 소작농 출신 무슬림 상인들 뿐만 아니라 수염을 길러 라틴인같지 않아 보이는 이들을 보이는대로 살상하였다. 이로써 19명의 상인들이 희생되었고 그 유가족들은이 피묻은 옷을 카이로에 보내 하소연하자 칼라운은 주동자 전원 소환을 요구하나 아크레 측이 그들은 '외국인'이라 처벌이 어렵다고 답해오자 원정을 결심하였다. 그는 디마슈크 주둔군에게 카이사레아로 이동해 튀니스가 목적이라며 공성병기를 주조하게 하였다. 이후 11월 칼라운은 대군과 함께 출정하나 곧 쓰러져 사망하였다. 뒤를 이은 그의 장남 살라흐 앗 딘 칼릴 역시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아크레 원정을 추진하였다. 1290년 12월 레바논 목재로 지어진 대형 투석기 알 가비다가 완성되어 디마슈크에 당도하였고 이듬해 초엽에는 크락 데 슈발리에에서 주조한 대형 투석기 알 만수르가 당도했다. 후자의 운송은 수십마리의 소가 동원되었다. 2월 칼릴은 공성병기 전문가 이즈 앗 딘 아이바크 알 아프람을 디마슈크로 파견해 투석기 재조립 및 운반을 맡겼다. 3월 3일 도시에 당도한 그는 준비에 착수하였다. 6일 후 대사원의 금요 예배에서는 공성병기 운송 자원자를 모집하였다. 23일에 디마슈크 총독 라긴은 아크레로 출정하였고 같은날 저녁 하마의 병력이 디마슈크에 당도하였다. 3일 후 아크레에 당도한 라긴은 포위망 구축에 나섰다. 그 다음날 트리폴리 병력이 합류하였고 술탄 칼릴은 대군과 함께 4월 5일에 당도하였다. 2일 후 92대의 투석기가 디마슈크에서 당도하였고 그 다음날 하마 병력도 당도하였다. 4월 15-16일 십자군은 포위망 중 디마슈크 부대 쪽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한편 십자군과 내통하던 아미르 알 파크리는 병을 핑계로 디마슈크로 이탈하였는데 이를 의심한 칼릴은 5월에 그를 체포하여 압송시켰다. 이에 알 파크리와 친한 디마슈크 총독 라긴이 밤을 틈타 도주하려 했는데, 아미르 알람 앗 딘 알 다와다리가 '무슬림의 대의'를 손상시키지 말자며 만류하였다. 다음날 칼릴은 라긴을 불러 예복을 하사하며 신뢰를 보였는데, 3일 후에 돌연 그를 체포하여 사파드 성채에 감금하였다. 1291년 5월 내내 벌어진 처절한 전투 끝에 아크레는 함락되었고, 6월 7일 칼릴은 280명의 포로와 디마슈크에 개선하였다. 오전이었음에도 주민들은 종교를 막론하고 촛불을 들고 나와 그를 환영하였다. 그해 내로 십자군의 자취는 레반트 해안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디마슈크에서도 십자군에 대한 기억은 점점 잊혀지며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1299년 말엽 홈스에서 맘루크 군을 격파한 몽골의 가잔 칸은 1300년 1월 디마슈크를 무혈 점령하였다. 대사원에서는 가잔 칸의 이름으로 예배가 인도되었다. 다만 시타델의 수비대는 저항하였고, 차가타이 칸국의 침공에 대비해야 했던 가잔 칸은 2월 물라이 휘하 1만의 병력을 남기고 회군하였다. 물라이는 팔레스타인을 약탈한 후 3월에 디마슈크로 돌아왔는데, 이내 그 역시 회군하였고 시리아는 5월에 맘루크 왕조령으로 회복되었다. 가잔 칸과 맘루크 사절..? * 12월 22-23일 :''' 3차 홈스 전투 ''' 가잔 칸, 앗 나시르의 맘루크 군 격파[* 패퇴하는 맘루크 군을 마론파-드루즈인 궁병들이 공격함] * 1300년 : 샤를 2세, 루체라 함락. 사라센 주민 학살 혹은 노예화 /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십자군 모병 목적으로 성년 선포[* 여름. 교황 보니파시오 8세, 가잔 칸이 파견한 기스카르도 부스타리 등 1백여 일 칸국 사절단 접견. 사절단도 성년 행사 참가, 기스카르도는 성지 반환 감독자로 추정됨. 다만 곧 실상 전해짐] * 1월 가잔 칸, 다마스쿠스 무혈입성. 시타델 저항 * 2월 : 가잔 칸, 차가타이 칸국의 침공에 물라이 휘하 1만 병력 남기고 후퇴. 11월 복귀 약속 * 3월 중순 : 물라이, 팔레스타인 약탈. 가자에서 회군, 다마스쿠스 귀환. 며칠 후 본국 철수[* 5월이라고도. 이때 예루살렘을 잠시 점령했고 바위의 돔 황금 문을 허물었다고도] 1342년 : 안티오크 총대주교 이그나투스 2세, 주교좌를 다마스쿠스로 이전 알 아지즈 디마슈크에서 사로잡음 ? 이스마트 앗 딘 - 부친을 위한 마드라사와 영묘 건설 후원, 자마 알 자지드에 묻힘 985년 알 무카디시, 이사 미나렛 최근 지어졌다고 기록. 1174년 사원 북부 화재 셀주크 제국의 쇠퇴기에는 토후국이 세워져 다시 한번 수도가 되었다. ([[부리 왕조]] 참고) [[파일:34508513-1-1-1.jpg|width=800]] 중세 성벽과 [[살라흐 앗 딘]]의 동상 >세상의 보화는 10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9가 다마스쿠스에 있다. >ㅡ 12세기 아슈아리 학파의 하디스 학자 이븐 아사키르[* 다마스쿠스 출생으로, 핫지 (성지 순례) 후 바그다드부터 메르브까지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며 하디스를 수집해 하피즈가 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술탄 누르 앗 딘의 후원을 받아 '타리크 디마쉬크 (다마스쿠스 역사)'를 집필하였고 이에 술탄은 그를 위해 다르 알 하디스 마드라사를 세워주었다] 고 [[파일:e0040579_0153787.jpg]] 1148년, [[2차 십자군]]에게 공격을 받았으나 [[장기 왕조]]의 누레딘의 지원병에 의해 구원되었고 결국 1154년에 누레딘의 영토가 되었다. 그 후로는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전까지 [[레반트]] [[이슬람]] 세력의 중요 거점이었다. 이후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시기에는 시리아 지역의 중심 도시이자 제2의 수도로서 번영하였다. 1400년 3월 24일 티무르가 디마슈크 점령, 주민들 노예로 끌고감 [[파일:다마스쿠스 베네치아.jpg]] 베네치아 대사관, 1511년 지오반니 벨리니 작 [[파일:근대 다마스쿠스.jpg]] 근대 사진첩의 밥 샤리키 (동문) [[파일:다마스쿠스 세례자 요한.jpg]] 오스만 당국에 의해 복원된 야흐야 (세례자 요한) 성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