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아이유브 왕조 ===== [[파일:살라딘 영묘 1.jpg]] 1175년 초엽,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의 개입으로 알레포 포위를 풀었다. 다만 4월에 그는 모술의 군대를 격파한 후 앗 살리흐로부터 알레포를 제외한 시리아의 통치권을 인정받은 후 '시리아와 이집트의 왕'이라 칭하며 5월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이듬해 살라흐 앗 딘은 우누르의 딸이자 누르 앗 딘의 과부 이스마트 앗 딘 카툰과 결혼하였다. 그해 4월, 북상한 그는 재차 모술 군대를 격파하였고 다음달 칼리파 [[알 무스타디]]로부터 술탄으로 책봉되었다. 이후 다시 알레포를 포위했지만 역시나 십자군의 개입으로 휴전 후 철수한 살라흐 앗 딘은 이집트로 향하였다. 1176년 9월부터 1181년 5월까지 그가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먼저 동생 투란샤가 디마슈크를 맡았는데, 그는 실정으로 1178년 조카 파루크샤로 대체되었다. 이듬해 파루크샤는 예루살렘 왕국의 원수 음프헤 2세를 전사시키는[* 정확힌 보두앵 4세의 퇴로를 보장하기 위해 싸우다 중상입고 곧 사망한 것] 공을 세웠고 베이루트 일대까지 습격하였다. 이에 십자군이 반격하였으나 마르즈 아이윤 전투에서 파루크샤를 지원하러 온 살라흐 앗 딘에게 패배하였다. 이때 많은 포로가 디마슈크에 수용되었는데, 그중 템플기사단장 오도는 석방 협상을 거부하고 그곳에서 옥사하였다. 1180년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과 2년의 휴전을 맺었다. 이듬해 말엽 알레포의 앗 살리흐가 사망하자 살라흐 앗 딘은 1182년 5월 동생 알 아딜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북상하였다. 파루크샤와 함께 휴전이 끝난 십자군과 싸우던 그는 장기 왕조와의 휴전이 끝난 9월 재차 북상하였다. 한편 두달 후 파루크샤는 디마슈크에서 사망하였다. 그러자 12월 레몽이 보스라, 보두앵 4세가 디마슈크로 진군해 왔는데 후자의 병세 악화로 철수하였다.[* 보두앵은 도시 외곽의 모스크를 파괴하려 했으나 현지 기독교도들이 그런다면 바알벡 총독 이븐 알 무카담이 시내 교회 파괴할 것이라 만류] 그리고 1183년 마침내 알레포를 정복한 살라흐 앗 딘은 8월 24일 디마슈크로 개선하였다. 다만 부재 시에 메카를 노리는 등 악행을 일삼은 르노 드 샤티용의 응징을 위해 한달도 안되어 카라크로 출정하였고 12월에야 귀환하였다. 1184년 살라흐 앗 딘은 재차 카라크를 포위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9월 회군하였다. 1186년 모술의 복속까지 얻어낸 살라흐 앗 딘은 그해 말엽 르노가 재차 무슬림 순례단을 공격하자 휴전 파기를 선언하였다. 이윽고 이집트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제후들을 소환한 그는 1187년 3월 17일 디마슈크에서 출정하였다. 그해 7월 벌어진 [[하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살라흐 앗 딘은 팔레스타인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디마슈크는 십자군 포로들로 북적거렸고, 세달 후 예루살렘이 탈환되자 디마슈크의 카디 무히 앗 딘 이븐 알 자키가 알 아크사에서 금요 예배를 인도하였다. 살라흐 앗 딘은 1188년 5월 약 1년만에 디마슈크로 돌아왔는데 같은달 재차 출정하여 트리폴리-안티오크 일대를 원정하고 1189년 3월에야 돌아왔다. 한달의 휴식 후 이번엔 보포르 성채 공격에 나선 그는 항복을 번복한 영주 르노 그라니어를 8월 디마슈크에 감금하였다.[* 다만 이듬해 보포르 성채가 정말로 항복하며 풀려남] 그후 아크레 포위전과 함께 3차 십자군이 당도하였다. 1년 넘게 싸운 후 리처드 1세와 휴전을 맺은 살라흐 앗 딘은 1192년 11월 4일 디마슈크에 개선하였다. 급속히 쇠약해진 그는 아미르들을 모아 장남 알 아프달 알리에게 충성 서약을 시킨 후 1193년 3월 4일 사망하였다. 이후 세 아들들이 제국을 분할 상속받았는데, 알 아프달이 디마슈크를 중심으로 술탄위를 이어받았다. 한편 살라흐 앗 딘의 동생 알 아딜은 조카들의 야심을 자극하여 분열시켰고, 1194년 5월 이집트의 알 아지즈는 디마슈크를 공격하였다. 알 아프달의 도움 요청을 받은 알 아딜은 팔레스타인을 알 아지즈에 넘겨주는 중재안을 내어 평화를 회복하였다. 이듬해 여름 알 아지즈는 재차 디마슈크를 공격했는데, 알 아딜은 재차 알 아프달을 도와 이를 격퇴하였다. 그러나 알 아프달이 이집트 공격에 나서자 알 아딜은 혼란 종식을 명분 삼아 디마슈크를 포위하였고, 시타델에서 버티던 알 아프달은 1196년 7월 3일 항복하며 살카드로 은퇴하였다. 이로써 알 아딜은 새 술탄 알 아지즈의 이름으로 디마슈크를 지배하게 되었다. 1198년 독일 십자군을 격퇴하고 5년 8개월의 휴전을 체결한 알 아딜은 그해 말엽 알 아지즈가 급사하고 12세 아들 알 만수르가 계승하였다. 알 아딜을 경계한 이집트의 군부는 알 아프달을 섭정으로 삼고 알레포의 앗 자히르와 1199년 6월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다. 자지라에 있던 알 아딜은 급히 회군하여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6개월간 이어지던 포위는 이듬해 1월 알 아딜의 장남 알 카밀이 원군과 당도하자 풀렸다. 반격에 나선 알 아딜은 알 아프달을 격파한 후 2월 9일 카이로에 입성하였고 8일 후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그의 부재 동안 차남 알 무아잠이 디마슈크를 맡았는데, 이듬해 8월 알 아프달과 앗 자히르가 재차 도시를 포위하였다. 알 카밀을 이집트에 남기고 북상한 알 아딜은 두 형제를 이간질하고 보상을 약속하여 포위는 풀렸고, 1201년 10월 9일 알 아딜은 디마슈크에 개선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