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십자군 전쟁기 ==== [[파일:다마스쿠스시타델2.jpg]] 디마슈크 시타델과 대사원 1062년부터 이집트에서 내전이 터지며 파티마 조는 급속히 쇠퇴하였다. 이듬해 4월, 아르메니아계 맘루크 바드르 알 자말리가 디마슈크의 왈리 (군사령관 =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도시 서남쪽 교외인 알 미자 (카르프 수사)에 관저를 세웠다. 비록 바드르의 군대가 알리 가문의 아부 타히르 하이다라가 이끄는 민병대와 충돌한 후 그는 해임되었지만, 1066년 7월 재차 임명되었다. 바드르는 이번엔 밥 알 하디드 (북서문) 밖의 카스르 앗 술타나에 궁전을 세웠다. 같은해 압둘 샤라프 이븐 아불 자닌이 자라흐 부족과 디마슈크를 공격하였지만 격퇴되었다. 1068년에는 하이다라가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진압되었지만 바드르의 궁전과 대사원의 북쪽 회랑과 돔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1069년이라고도] 그러던 1070년, 알 무스탄시르의 소환에 나시르 앗 다울라를 축출하고 카이로를 안정시킨 바드르는 [[아크레]]로 거점을 옮겨 티레와 [[트리폴리]] 등 도시국가써 자립한 레반트 해안에 대한 재정복에 나섰다. 바드르가 떠난 사이에 나시르 앗 다울라는 재차 카이로를 장악하였고, 디마슈크 총독 무알라 이븐 하이다르 역시 자립하였다. 알 무스탄시르의 탄원으로 재차 이집트로 향한 바드르는 튀르크 군벌들을 숙청하고 전권을 장악하였다. (1074년) 한편 셀주크 제국에서 축출된 호라즘 출신 튀르크 무장 아트시즈 이븐 우바크는 파티마 조의 혼란을 틈타 1071년부터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상태였는데, 1076년 디마슈크를 장악하였다. 그는 성 북서쪽에 시타델 건설을 시작하였다. 1076-77년 아트시즈는 이집트 공격에 나섰지만, 지하드를 선포하며 반격에 나선 바드르에게 격퇴되었다.[* 아트시즈는 후퇴하며 반란을 일으킨 예루살렘의 동부 구역을 포위, 함락하였는데 알 아크사 사원으로 피신한 이들을 포함한 주민 3천여명을 학살하였다 (바위의 돔으로 피신한 이들은 예외)] 이후 바드르는 1077년과 1078년에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다. 그의 부관 나스르 앗 다울라가 지휘한 후자의 포위는 아트시즈의 요청을 수용한 셀주크 왕공 투투쉬의 남하로 풀렸다. (1078년 10월 10일) 이후 디마슈크에 입성한 투투쉬는 이내 아트시즈를 투옥 후 교살하곤 자신이 도시를 차지하였다. 투투쉬는 디마슈크를 수도로 삼았고 아트시즈가 삽을 뜬 시타델 (칼라)을 완성시켜 거주하였다. 자신만의 국가를 세우려는 야먕과 함께 투투쉬는 디마슈크를 수도로 여기고 관심을 보였다. 1082년 그의 지시에 의해 13년 전 화재로 훼손되었던 대사원이 돔이 복원되었고, 이후 8세기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외에 대사원의 기둥과 벽면의 모자이크 역시 보완되었다. 1086년 5월, 투투쉬는 [[우카일 왕조]]가 철수한 알레포를 접수하였는데 형인 술탄 [[말리크샤 1세]]가 남하하자 그해 10월 디마슈크로 회군하였다. 1092년 11월, 말리크샤가 사망하자 셀주크 제국은 내전으로 치닫았다. 술탄을 칭한 투투쉬는 1094년 북진해 재차 알레포를 점령하고 이듬해 이란으로 진격하였으나 [[바르키야루크]]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그후 투투쉬의 장남 리드완은 알레포에서 동생들을 암살하고 시리아를 독차지하려 했는데, 셋째 동생 샴스 알 물크 두카크가 탈출하여 디마슈크에서 자립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