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압바스 왕조 ==== [[파일:다마스쿠스 보물고2.jpg|width=800]] 788년 알 파들에 의해 대사원 서쪽 뜰에 세워진 보물의 돔 750년 초엽, 자브 강 전투에서 패배한 마르완은 디마슈크로 철수했지만 예메니가 장악한 도시는 칼리파에게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마르완은 이집트로 도주하였고, 결국 전사하였다. 이로써 우마이야 조는 멸망하였다. 같은해 4월 25일, 약간의 저항 끝에 디마슈크는 압바스 왕공 압둘라 이븐 알리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한 세기 이전의 정복과 달리, 750년의 정복은 같은 이슬람 세력 간에 벌어진 것이었음에도 더욱 큰 파괴로 이어졌다. 천명의 교체를 상징하기 위해 구체제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는 의도였다. 우선 밥 앗 사기르 (서남문) 바깥의 묘지에 조성된 우마이야 가문의 무덤이 파괴되었다. 무아위야, 아브드 알 말리크, 히샴을 필두로 유골들이 훼손되었고 후일의 참배를 막기 위해 각각의 무덤 위치에 대한 기록도 말소되었다. 도시를 두른 성벽은 파괴되었고 우마이야 가문의 구성원들은 학살되었다. 디마슈크는 더이상 대제국의 수도가 아닌 지방 도시에 국한되었다. 이러한 가혹한 처사와 함께 호라산 출신 병사들의 횡포는 압바스 조에 대한 디마슈크의 여론은 점차 악화되었다. 압바스 조에 편입된 후 약 6개월간 도시는 반란의 불길에 휩쌓였다. 시리아 북부 [[킨나스린]]에서 무아위야 2세의 조카 지야드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시민들이 봉기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디마슈크의 움직임은 손쉽게 진압되었다. 도시를 점령한 후 시리아 총독을 맡은 압둘라는 기존 관리들을 축출하고 장군들을 해임하여 반란의 가능성을 낮추었다. 이슬람의 승리를 상징하는 대사원을 제외한 우마이야 조의 건축물 역시 파괴되었다. 다만 녹색 궁전은 한동안 총독 관저로 사용되긴 하였다. 754년, 칼리파 [[아부 아바스]]가 사망하자 압둘라는 조카 [[알 만수르]]에 대항해 제위를 노렸다. 이때 시리아 귀족들은 기존 특권 회복을 노리며 그에게 가담했으나 결국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며 무위로 돌아갔다. 시리아를 기반으로 했던 우마이야 조와 달리 압바스 조는 이라크를 중심으로 하였고, 디마슈크는 바그다드에 밀려 점차 쇠퇴하였다. [* 756년 서쪽 안달루스에 후우마이야 조가 세워지며 우마이야 조의 부활에 대한 경각심이 극대화 된 결과로 압바스 당국의 차별이 더욱 심해졌다] 시리아 북부가 동로마에 대한 원정의 후방 보급 기지로 등장했던 것과 달리, 도시는 공식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압둘라 이후 그의 동생 살리흐, 종손 압둘 와하브를 거쳐 766년 살리흐의 아들 알 파들이 디마슈크 총독이 되었다. 알 파들은 약 10여 년간 통치한 후 자지라로 전임되었는데, 예멘계 귀족의 정원에서 발생한 수박 절도가 부족 간의 다툼으로 비화된 것이 이유였다. 780년, 자지라에서 돌아온 알 파들은 대사원 뜰에 정확한 예배 시간을 알려줄 시계의 돔을 세웠다. 그후 이집트 총독을 지낸 그는 786년 경 해임되자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우마이야 대사원의 문을 교체하고 안뜰에 사원의 와크프 (재단) 재산을 수용할 보물고 (바이트 알 마알)을 세웠다. 789년 보물의 돔이 완공될 무렵 알 파들은 생을 마감하였다.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는 786년 즉위 이전 3년 여간 디마슈크 총독을 지내었다. 이후 그는 총애하던 바르마크 가문의 야흐야와 자파르[* 천일야화의 매인 빌런인 그 자파르이다] 형제를 디마슈크 총독으로 봉하였는데, 다만 후자는 803년 부임한 그 해에 처형되었다. 그외에는 압바스 조의 개국 세력인 호라산 출신 인사들 (쿠라사니야)이 총독을 맡았다. 그러던 809년 하룬이 사망한 후 그의 두 아들 알 아민과 [[알 마문]]이 내전을 일으켰다. (4차 피트나) 이를 틈타 811년 우마이야 조의 복원을 기치로 한 수피야니 반란이 일어나 약 반세기 만에 흰 깃발이 휘날리기도 했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이후 녹색 궁전은 감옥으로 개조되었고 일부는 파괴되었다. 궁전과 대사원을 이어주던 회랑의 열주만이 19세기 중반까지 잔존하였다. 총독 관저는 자비야 성문 밖의 옛 알 핫자즈[*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 시대의 권신] 저택을 개조하여 이전되었다.[* 현재까지도 그 일대는 카스르 알 핫자즈로 불린다] 관저를 구시가지 밖으로 옮긴 것은 불온한 여론을 피해 구타 오아시스와 하우란 일대의 친압바스 부족들의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다. 부왕을 따라 디마슈크에 머물렀던 칼리파 알 마문은 831년 도시 북쪽 카이순 산의 기슭 데이르 무란에 화려한 행궁을 세웠다. 그 일대는 므닌 강에서 끌어온 운하와 함께 새로운 주거지로 발전하였고, 동시에 압바스 당국의 거점이 되었다. 840년대 바누 카이스 세력이 디마슈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칼리파 [[알 와시크]]가 파견한 장군 라자 이븐 아이유브는 데이르 무란을 본부로 삼았다. 칼리파 [[알 무타와킬]]은 동로마 원정 준비를 염두에 두고 37일간 다마스쿠스에 머물며 천도까지 생각했지만 초여름의 습한 기후로 포기하였다. 그후 도시는 특별한 일 없이 9세기 중반을 보냈다. 855년 북쪽 홈스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칼리파의 지시대로 총독 살리흐 알 압바시가 원군을 파견한 것 정도였다. 한편 9세기 들어 아랍계 기독교도들의 이슬람 개종이 촉진되었고, 디마슈크 역시 무슬림 다수 도시로 변모하였다. 그동안 압바스 조 역시 튀르크 용병 (굴람)의 유입과 함께 서서히 쇠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