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대사원 건립 ===== [[파일:다마스쿠스 마스지드.jpg]]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심판의 날에 이사(예수)가 왼편에 보이는 첨탑에 강림할 것이라 한다. 이슬람 정복 후에도 디마슈크는 큰 변화를 겪지는 않았다. 열성 정교도들과 동로마 병력 외에 시민들과 하급 관료들은 그대로 도시에 남았고, 단성론파 기독교는 여전히 우세하였다. 7-8세기에도 교황 그레고리오 3세와 '마지막 시리아인 교부'인 요안니스가 배출되었다. 랍계 동로마 관리 만수르 이븐 사르준[* 그의 손자가 바로 앞서 언급된 요안니스였다]과 같은 단성론파 관리들은 이슬람 정부에 기꺼이 협력하였다. 도망친 귀족들의 재산을 차지한 우마이야 일족을 제외하면 아랍 무슬림들도 별로 유입되지 않았다.[* 심지어 무아위야는 우마이야 일족과 그 관련자들을 제외하면 이민을 받지 않기까지 하였다. 우마이야 가문은 동로마 총독의 궁전이 있던 성 요한 바실리카 남쪽 지역에 집단 거했다. 초청받은 사하바들을 비롯한 다른 아랍 무슬림들은 성 밖 구타 오아시스에 주로 거주했다. 서기 700년 무렵 약 350만에 달한 시리아 인구 중 무슬림은 약 20만 정도로 추정된다.] 그들은 군기 유지를 위해 병영도시인 [[암사르]]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야지드 1세 때에 수로 보수가 이루어진 것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였다. 천 년간 이어지던 헬레니즘 문화에서 기존의 셈족 문화로의 전환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초기 우마이야 조의 종교색이 약한 느슨한 지배 하에서의 점진적인 변화는 상술한 아브드 알 말리크의 중앙집권화 및 아랍화 정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705년 즉위한 [[왈리드 1세]]는 부왕의 정책을 완성할 사업에 착수했는데, 바로 디마슈크의 성 요한 대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디마슈크의 모스크는 성 요한 성당 옆, 메카 방면인 남쪽 회랑에 작은 사원을 세워 이용해왔다. 하지만 점차 개종자 및 무슬림 인구의 자연 증가로 예배 공간이 부족해졌다. 선대의 정복으로 대서양에서 파미르에 이르게 된 이슬람 대제국의 수도가 중앙 사원을 이교도 사원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무슬림들에게 불편한 사실이었다. 앞서 두 칼리파들이 기독교 공동체와 성당 할양을 놓고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한 바 있었다. 693년 예루살렘에 [[바위의 돔]]을 세운 부친처럼 명성을 남기고 싶었던 왈리드는 즉위 이듬해인 706년, 재차 협상에 나서 시내에 추가로 3개의 성당 부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성 요한 성당과 신전 단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로써 여전히 정교회 수중에 있던 성 마리 성당이 디마슈크의 중심 성당이 되었다.] 이슬람이 약 1500년간 이어진 디마슈크의 종교적 중심을 접수한 것이다. 기존 성당과 모스크가 모두 철거되는 것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 도중 지하 동굴에서 야흐야의 머리가 담긴 유물함이 발견되었다. 이에 왈리드는 친히 들어가 확인한 후 다시 매장하고, 그 위에 성소를 세우게 하였다.[* 알 사카섹이라 불림,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오스만 당국이 중건한 것이다] 7년치 예산에 맞먹는 백만 디나르에 이르는 비용과 콥트, 이란, 그리스, 힌두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1만 2천명의 장인들이 동원된 대역사는 10여 년이 걸렸고, 왈리드는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고 마감 공사가 진행되던 715년 초에 사망하였다. 대사원은 다음 칼리파인 [[술라이만]]의 즉위 직후에야 완공되었다. 모스크는 메카 방면인 남쪽 회랑을 3배로 증축하여 중심으로 삼았고, 안뜰에서 바라본 건물 외벽은 그리스 장인들에 의해 (이슬람 관념의) 천국을 묘사한 황금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화려함을 뽐내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휴전을 기념해 파견해 준 장인들이었다. 기둥을 제외한 모든 벽면이 그러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었다. 비록 현재는 중앙부를 제외한 모자이크가 소실되었지만, 라벤나의 산 비텔레 성당과 함께 현존하는 후기 로마 모자이크를 옅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로마식 성당과 달리 내부 외에 외부까지 모자이크로 도배한 것은 우마이야 대사원이 유일무이하다. 또한 현재의 단일 돔과 달리 당시에는 하기아 소피아처럼 2개의 작은 돔이 중심 돔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12세기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는 목재로 만들어진 이들 돔에 세겨진 화려한 장식에 감탄하며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1893년의 화재로 현재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놀랍게도, 내부의 모자이크와 대리석 패턴은 더욱 화려했다고 한다. 대사원은 북쪽 외에 남쪽에도 회랑으로 둘러쌓인 안뜰을 두고 녹색 궁전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사원, 열주 회랑으로 둘러쌓인 안뜰, 궁전의 배치는 다른 우마이야 왕조 시대의 도시들에서도 나타난다. 한편 지붕에 덧씌울 납을 조달하기 위해 고대 석관까지 털었다고 한다. 한편 왈리드는 이 외에도 707-9년 메디나의 무함마드 집터에 예언자 모스크, 709-14년에 바위의 돔 옆에 알 아크사 모스크를 세웠다. 메디나, 예루살렘의 성지와 함께 수도 디마슈크가 대역사의 장으로 선택된 것. 이러한 건축들은 기존 문명들에 대한 이슬람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었다] 우마이야 대사원은 제국의 새 질서를 상징하였다. 그러나 디마슈크의 중요성은 대사원의 완공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기존 칼리파들이 자비야 혹은 이르비드에서 월동했던 정도를 넘어 술라이만은 팔레스타인에 신도시 라믈라를 세워 그곳에 거하였고, 후대 칼리파들도 요르단 일대에 별궁을 세워 종종 수도를 비웠다.[* 사실 건축광 왈리드 때부터 시작된 풍조였다. 히샴의 경우 기독교도들의 순례지였던 루사파를 개발함. 이러한 사막 지대의 별궁 건설은 아랍계 왕실의 과거 베두인적인 삶에 대한 회귀 혹은 향수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제국 자체도 쇠퇴하였다. 술라이만이 추진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은 대실패로 끝났고, 아랍인 중심 정책에 비아랍 무슬림 (마왈리)들의 분노가 축적되었다. 각지 총독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자립해버렸고, 그 틈에 알리의 후손들은 쉬아 반란을 준비하였다. 왈리드 후의 칼리파들은 단명하며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히샴]]이 장기 집권하긴 했지만 동로마와 투르게쉬, [[하자르 칸국]] 등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베르베르 대항거]]와 아랍 부족 간의 내분, 카와리지의 반란 등 내우외환이 이어졌다. 그동안 도시에는 예멘계 아랍인이 유입되었다. 여기에 히샴이 사망한 후 [[왈리드 2세]]가 방탕함에 빠지자 우마이야 조는 내분에 돌입하였다. 그의 사치스러움을 혐오한 귀족들이 봉기해 별궁으로 진군하였고, 왈리드는 디마슈크 부근 성채로 도주했다가 살해되었다. 그의 수급은 디마슈크 시내에 전시되었다. 칼리파로 옹립된 사촌 [[야지드 3세]]는 청빈함을 드러내기 위해 당나귀를 타고 디마슈크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혁에 나서기도 전에 요절하였고, 동생 이브라힘이 계승했지만 오촌인 원로 [[마르완 2세]]가 정권을 잡았다. (744년 12월) 마르완은 우마이야 대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하지만 이미 시리아 남부는 [[바누 칼브]]를 비롯한 예멘계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바누 카이스를 선호한 마르완은 본래 임지이던 자지라의 [[하란]]으로 천도하였다. 도시의 연이은 역병 혹은 동쪽 호라산의 반란에 대처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어쨋거나 90여년에 이은 디마슈크의 수도 역할은 종식되었다. 그리고 우마이야 제국 역시 종말이 임박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