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루왕 (문단 편집) == 생애 == [[온조왕]]의 장남으로 [[온조왕]]의 서기 10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서기 28년에 온조왕이 세상을 떠나자 군주로 즉위했다. 온조왕과 마찬가지로 [[말갈]][* 말갈 문서에 있듯 [[만주]] 쪽의 말갈이 아니라 2번 단락의 [[가짜말갈]], 즉 [[동예]] 등 [[예맥]]계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과 미친듯이 싸우면서도 계속 내정을 살피려 한 군주다. 서기 29년(다루왕 2년) 시조 동명묘에 참배했고[* [[고구려]] [[동명성왕]]일 수도 있지만 [[부여]] [[동명왕]]으로 보기도 한다.] 말갈과는 30년 10월에 동부의 장수 [[흘우]]가 마수산 서쪽, 31년 8월에 고목성의 [[곤우]]가 말갈을 상대로 승리했으나 34년 마수성을 말갈에 빼앗기는 등 일진일퇴가 이어졌다. 55년에도 말갈이 쳐들어왔고 다루왕은 대비하기 위해 우곡성을 쌓았다. 다루왕 시대는 [[자연재해]]가 심해 [[곡식]]을 아끼기 위해 38년 [[술]] 빚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기록이 남아있는 [[금주]]령 기록이다.] 가난한 자에게 2섬씩 곡식을 나눠주는 등 민심 달래기에 힘썼다. 55년에는 심한 [[가뭄]]이 들자 [[사형]]수까지 모두 용서해 주기도 했다. 다루왕은 《삼국사기》 기록상 백제의 군주들 중 최초로 [[신라]]와 칼을 맞댄 군주다. 다루왕 재위 후반부 39년인 63년 음력 10월에 지금의 [[청주시|청주]]인 낭자곡성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신라에 처음으로 [[사신(외교)|사신]]을 보내 만나려고 했지만 [[탈해 이사금]]이 무시해버린걸 계기로 [[악연]]이 싹트게 된다. 64년 음력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이겼으며 64년 겨울 음력 10월에 또 신라의 구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탈해 이사금이 [[기병]] 2,000명을 보내는 바람에 졌다. 66년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00명을 주둔시켰으나 신라에게 곧 다시 빼앗겼다. 70년에 다시금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기록이 누락돼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74년에는 신라의 변방을 공격했으나 탈해 이사금이 군사를 보내는 바람에 졌다. 75년 음력 10월에 또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그러나 76년 음력 9월에 신라가 군사를 보내는 바람에 와산성을 다시 빼앗겼다. 하지만 정말로 다루왕 시대에 백제가 신라와 [[전쟁]]을 벌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두 국가 모두 서로 마주할 수 있는 [[소백산맥]] 일대까지 아직 진출하지 못하였기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다른 [[역사서]]와의 기록 충돌도 있는데 또 다른 사서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훨씬 이후 시대인 [[4세기]] 신라 왕 걸해 이질금([[흘해 이사금]]) 때에 백제와 신라가 처음 군사적으로 [[충돌]]했다고 쓰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 "第十六乞解尼叱今: 昔氏. 父于老音角干, 即奈解王第二子也. 庚午□立, 治十六年. '''是王代百済兵始來侵.'''" 제16대 걸해 이질금은 석씨이다. 경오년에 즉위하여 16년을 다스렸다. 이 군주대에 백제의 병사가 처음으로 침공해왔다.] 그래서 이 기록들을 해명하기 위한 수많은 [[학설]]이 쏟아졌는데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 신라가 속한 [[진한]]과 백제가 속한 [[마한]] 사이의 충돌이다. 또는 마한의 소국과 진한의 소국이 싸운 기록인데 [[삼한]]의 기록이 전부 누락되고 백제와 신라로만 기록됐다. * 소백산맥 일대의 철광을 두고 백제와 훗날 신라에 합류하는 [[김알지|김씨 족단]]이 전쟁을 벌인 것이다. * 신라 쪽으로 남하하던 [[진국]]계와 백제 간의 전쟁이다(천관우). * 후대에 있었던 신라와 백제의 전쟁을 끌어올린 기록이다. 선석열(1994). <삼국사기 신라본기 상대 백제관계기사의 검토와 그 기년>. 《한국고대사연구》, 7, 303-350p에서는 다루왕 시기의 신라와의 [[무력]] 충돌 기록이 [[위덕왕]] 대의 사실을 과거로 옮겨 적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 그냥 헛소리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마한 54개국을 거느리는 마한과 진한 소국 하나인 신라가 어떻게 전쟁을 하냐면서 전쟁을 부인했다. * 이 때의 전쟁은 일시적 무력 충돌에 가까운 것이며 후대의 [[정복]] 전쟁과는 다르다([[임용한]], 《한국 고대 전쟁사》). * 신라 관련 사서에만 있던 기록을 <백제본기>에 옮겨 적은 것이다. 백제보다는 신라의 [[병력]] 상황 등이 더 자세히 묘사되며 신라 측의 사람 [[이름]]들만 주구장창 등장하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