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니엘 (문단 편집) ==== 11장 ==== 다니엘 11장이 말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페르시아에서 캄비세스(Cambyses, B.C. 529-522), 스메르디스(Smerdis, B.C. 522-521), 다리우스 히스타스피스(Darius Hystaspis, B.C. 521-486)의 뒤를 이어, 크세르크세스(Xerxes, B.C.486-465)가 왕이 되었고, 부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헬레니즘 제국]]의 마케도니아 지역을 침공했다. (11:2-3) * 그 후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헬레니즘 제국이 강성해졌으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은 후 [[헬레니즘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최측근이자 가까운 막료였던 4명의 장군에 의해 분할되었다. (11:4) * 남방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강한 힘을 가졌지만, 북방 왕조인 [[셀레우코스 왕조]]는 더욱 강했다. B.C. 250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그의 딸 베레니케(Berenice)를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 [[안티오코스 2세]]와 결혼시켰으나, 안티오코스 2세의 전처인 라오디케(Laodice)가 베레니케와 그녀의 아이를 살해하고, 결국에는 [[안티오코스 2세]]마저 독살시킴으로써 이 정략 결혼은 실패로 돌아갔다. (11:5-6) *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 이어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B.C. 246년 누이 베레니케의 복수를 위해 북방 왕조 곧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2세]]를 공격하여 6년간(B.C. 246-241) 전쟁을 했다. 이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자기 누이를 살해한 라오디케를 죽여 누이의 원수를 갚고, 4,000달란트의 금과 2500여개의 우상 등 수많은 전리품들을 이집트로 탈취해 갔고, B.C. 240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셀레우코스 2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침공을 보복하기 위해 평화 조약을 파기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있는 이집트를 침공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2세는 오히려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대패한 후, 소수의 남은 군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11:7-9) * 셀레우코스 2세의 두 아들, [[셀레우코스 3세]]와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셀레우코스 3세]]는 B.C. 227년 왕위에 즉위했으나 소아시아 전쟁에서 동료들에게 살해되었으며(B.C. 223), 그의 동생인 [[안티오코스 3세]]가 그 왕위를 계승한 뒤 [[페니키아]]와 [[팔레스티나]](B.C. 219-218) 원정에 나섰으나,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반격에 막혀 [[라피아 전투]]에서 패배했다. 패배로 말미암아 원정은 실패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그 승리에 교만해져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갔고, 그 결과로 사망했다(B.C.203). (11:10-12) * [[안티오코스 3세]]는 이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공략하여 [[팔레스티나]]를 점령했다. 안티오코스 3세의 군대들은 파니움 전투에서 이집트의 스코파스 휘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B.C. 200),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대는 페니키아 해변의 [[시돈]]까지 퇴각하였다. 이후 시돈마저 함락되고, B.C. 198년 [[팔레스티나]] 지방은 [[안티오코스 3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11:13-16) *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 침략 정책을 변경하고 정략적으로 이집트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B.C. 197). 곧 안티오코스 3세는 자신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1세|클레오파트라(Cleopatra)]]를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아내로 주어(B.C. 195)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클레오파트라가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탁하여 그로 하여금 로마와 동맹을 맺게 함으로써, [[안티오코스 3세]]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11:17) * 이집트 침략 정책을 수정한 [[안티오코스 3세]]는 군사력을 서쪽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집중시켜 육로와 해로를 통해 그곳을 점령한다(B.C. 197). 그러나 그의 군대는 B.C.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마그네시아(Magnesia) 전투]]에서 로마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루키우스 스키피오]](Lucius Scipio) 장군에게 대패함으로써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 이 패배로 말미암아 [[안티오코스 3세]]는 본국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바닥난 재정을 메꾸기 위해 시도한 엘리마이스의 벨 사원(the temple of Bel) 약탈까지 실패함으로써 그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다(B.C.187). (11:18-19) * [[안티오코스 3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셀레우코스 4세]]는 강제적인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임명한 재무 장관 헬리오도로스(Heliodorus)에게 [[팔레스티나]]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강제적으로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한편 이 [[셀레우코스 4세]]는 바로 자신이 임명한 헬리오도로스에게 독살당하여 10여 년의 통치를 마감한다. (11:20) * [[안티오코스 4세]]는 안티오코스 3세의 둘째 아들로,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에 패배한 때(B.C.190) 로마에 인질로 끌려가 14년을 보냈다. 그의 형인 셀레우코스 4세의 장자 '[[데메트리오스 1세|데메트리오스]]'를 대신 인질로 잡아두고 시리아로 귀환하던 중, 형의 죽음을 전해 듣고 형의 독살자인 헬리오도로스를 제거하고 실질적인 왕위 계승자인 '데메트리오스' 대신 왕위에 올랐다. 이후 그는 조카 대신 왕위에 오른 사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악의적인 흉계와 권모술수를 사용했다. (11:21) * [[셀레우코스 4세]]를 독살하고 왕위를 넘본 헬리오도로스를 추종하는 무리들과, 안티오코스와 동맹을 맺었던 어떤 왕[* 오니아스 3세(Onias III)란 견해가 있으나 확실치 않다.]은 [[안티오코스 4세]]에게 패배했다. (11:22) *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는 주변의 왕들과 위장된 동맹을 맺은 후,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 그들의 영토를 침공했다. 그는 이러한 침략의 부산물인 노략품을 백성들에게 분배함으로써 백성의 환심을 얻으려했다. (11:23-24) *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공격하여 그를 포로로 잡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해 매수된 측근들의 배신으로 패배했다. (11:25-26) * 왕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포로로 잡혀간 이집트는, 그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왕으로 세웠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에 대한 영향력을 가중시키려는 의도에서, 감금된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강제적인 평화 조약을 맺고, 이집트를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멤피스]]를 중심으로한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왕국으로 분열시키려 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안티오코스 4세에 대한 복수를 위해 때를 기다렸고, 결국 이 조약은 후일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연합, 그리고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의 간섭으로 파기되었다. (11:27) * 1차 이집트 원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가던 안티오코스 4세는 이스라엘을 침공해 자신의 통치권 내에 두려했고, 그는 '야손'(Jason) 대신 자신이 지명한 '메넬라오스'(Menelaus)를 [[대제사장]]에 복위시키고 성전 기물을 탈취하며 예루살렘 성 안에 이방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 후 안티오코스 4세는 2차 이집트 원정 때 [[키프로스]](Cyprus)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까지 진군했으나, 결국 로마의 개입으로 퇴각했다. (11:28) * 2차 이집트 원정에 실패한 [[안티오코스 4세]]는 이스라엘에게 분풀이를 했고,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해 임명되어 그의 성전 약탈을 묵인하고 신앙을 저버린 [[대제사장]] 메넬라오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포함해 에피파네스의 헬레니즘화 정책에 동조한 모든 배교한 유대인들은 높은 자리에 앉게 됐다. (11:29-30) * [[안티오코스 4세]]의 군대는 거룩한 지성소에 함부로 출입했고, 번제단을 허물어버리고 그곳에 [[제우스]] 신상을 세워놓고, 매달 25일이 되면 돼지와 돼지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유대인의 종교활동을 금지했다. (11:31) * [[안티오코스 4세]]는 배교한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신앙을 수호하고 율법을 준수하는 일에 순교적인 자세를 견지했던 인물들도 있었다. 그런 인물들이 안티오코스 4세에 맞서 조직적인 저항 운동을 전개했으나, 그러한 시도는 초기에는 안티오코스 4세의 잔혹한 핍박 때문에 심각한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한 저항은 [[유다 마카베오]](Judas Maccabaeus) 가(家)에 의해 실행된 [[마카베오 전쟁]]에 의해 조금은 도움을 받았으나, 마카베오 전쟁에 동참한 많은 유대인들은 다시 배반하고 말았다. (11:31-34) * [[안티오코스 4세]]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마카베오의 많은 군사들이 전사했고, 신앙을 지키다가 많은 유대인들이 순교했다. 이러한 자들의 순교는 남은 신실한 유대인들에게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요나단에 의해 에피파네스의 군대가 쫓겨나고 [[요한 히르카노스 1세]](John Hyrcanus)에 의해 강력한 독립 정부인 [[하스몬 왕조]]가 태동하여 이런 핍박의 때는 끝이 났다. (11:35) * [[안티오코스 4세]]는 스스로 현인신(顯人神)임을 자처했으며, 그가 만든 주화에 자신의 초상을 새겨놓고 그곳에 '신들의 신'이란 뜻의 '테오스'(Theos)란 글자를 새겨놓기까지 했다. (11:36) * [[안티오코스 4세]]는 자기 자신을 무엇보다 높여, 고국 시리아에서 [[제우스]]를 비롯해 공식적인 숭배의 대상이었던 고대의 신들이나, 시리아에서 여자들이 특히 숭배했던 '[[탐무즈]]'(Tammus), [[아도니스]]'(Adonis) 신들을 섬기지 않고, 그의 조상들이 알지 못했던 로마의 신인 '[[유피테르]]'(Jupiter)나 '[[마르스]]'(Mars)를 섬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안티오코스 4세는 요새를 수비하려고, 이방 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용병으로 썼고, 자기를 통치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크게 예우하여서, 높은 관직을 주고, 토지도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 (11:37-39) 다니엘 11장 40-45절까지를 39절 이후의 일로 봤을 때 정확히 일치하는 역사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일단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마지막 때에 남방왕과 북방왕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북방왕은 남방왕을 공격하여 영화로운 땅까지 쳐들어가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나, 에돔과 모압과 암몬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의 공격을 피한다. 북방왕은 이집트를 공격하여 노략물을 탈취하고, 리비아와 에티오피아 사람들도 그의 발 아래에 있다. 북방왕은 시리아의 동쪽과 북쪽에서 안 좋은 소식을 접하고, 이에 그 무리들을 죽이고자 한다. 북방왕은 이동식 장막 궁정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펼쳐놓는다. 그리고 북방왕은 도움을 받을 여지 없이 죽게 된다. (11:40-45) 이 부분은 [[안티오코스 4세]]의 행적을 다시 짧게 반복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마지막 때에'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안티오코스 4세]]의 때에 대해 짧게 요약하는 것이라고 봐도 어색하지 않다. 그 주장에 따라 11장 40-45절을 역사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남방왕인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북방왕 [[안티오코스 4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안티오코스 4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쳐들어가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에돔]], [[모압]], [[암몬]]은 일찍부터 안티오코스 4세와 행동을 같이했기에 안티오코스 4세로부터 침략을 받지 않았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노략물을 탈취했고, 이집트 인근 지역인 리비아, 에티오피아 출신 사람들 중 안티오코스 4세의 종이 된 사람들이 있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 원정에 성공한 뒤, 그의 본국 시리아의 동북쪽 지방에 있는 [[파르티아]](Parthia)[* [[미트리다테스 1세]]의 공격]와 [[아르메니아]](Armenia)의 반란 소식을 접하고, 진압을 위해 병사를 보냈다. 말년에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의 군대가 패배한 소식을 듣고 화풀이를 하러 [[엑바타나]]에서 이스라엘로 가던 길에 큰 병에 걸려, 타국의 산 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마카베오기|마카베오 하]] 9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