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닛산 (문단 편집) === 창업과 전성기 === 1914년 설립된 카이신샤(快進社) 자동차공업(1914년 설립)이 모체로, 이 회사는 [[일본]]에서도 오래된 자동차 회사 중 하나로 꼽힌다. 여기서 1914년 내놓은 차가 DAT였는데 이것은 회사 투자자 3인의 성의 이니셜을 딴 것이라고 한다.[* 덴 켄지로의 D, 아오야마 로쿠로의 A, 타케우치 메이타로의 T.] [[달리귀|脱兎(탈토)]], 그러니까 토끼처럼 재빠르다는 뜻도 된다고 한다. [[파일:external/nissangallery.jp.net/20141203_ghq_164-640x480.jpg|width=400]] 닷선 14형 승용차(1935년) 이 회사는 1931년 아유카와(鮎川) [[재벌/일본|재벌]]이라고도 불렀던 아이카와 요시스케[* [[복어계획]]의 입안자 중 한 명이기도 하며, [[대한민국]]에서 악명 높은 일본 정치인 중 하나인 [[이노우에 가오루]]의 외손자이기도 하다.]의 닛산 콘체른의 지주회사인 일본산업의 자회사가 된 후, [[1932년]] 닷선 브랜드 차량을 처음으로 생산했으며, 1933년 닷선 제조 부문을 '''자동차제조주식회사'''(自動車製造株式会社)로 분리시킨 다음, 1934년 모회사 명칭을 따서 현재의 명칭인 닛산자동차로 개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닛산자동차는 공장 대부분을 연합군에게 점령당해 어려움에 빠졌다. 4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미군정에 대한 반발 심리 등으로 인해 급진 좌파가 득세하였는데, 닛산 노조는 일본에서도 대표적인 강성 좌파 노조 중 하나가 되었으며, 닛산은 노조의 극렬한 투쟁으로 여러차례 위기에 빠졌다. [[6.25 전쟁]] 중 미군의 군용 트럭을 발주받아 생산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나면서 회사는 다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회사는 감원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급진 좌파 노조는 1953년 '닛산 대쟁의'로 불리는 격렬한 파업을 벌였다. 하지만 한국 전쟁으로 인해 반공주의가 높아진 분위기 속에서 일본 정부와 미군정은 강경하게 대응했고, 결국 돈줄이 막힌 노조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미국 유학파 출신이 이끄는 새 노조가 구성되었고, 사측과 새 노조의 합의로 임금을 삭감하는 사측은 감원하기로 했던 2000명의 고용을 유지했다. 비록 새 노조가 들어섰지만, 닛산에서 여전히 노조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뿐만 아니라 닛산 노조는 전 일본 노조 연합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닛산의 분위기는 50년대 이후 노조가 파업을 하지 않으며 상생협력 전통을 가진 도요타와 대비되는 것이었다. [[1955년]]에 공장을 정식으로 돌려받았으며, 이때부터 기술력을 바탕으로 닛산은 성장을 거듭했다. 50년대 후반부터 닛산은 해외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닛산은 이후 미국, 멕시코, 호주, 영국, 스페인,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이란 등 세계 각지에 공장을 세우며 공격적인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이는 현지 수입 규제 장벽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일본 국내의 강성 노조의 영향력을 피해가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해외 공장 증설보다 일본 국내 생산을 우선하는 도요타와 대비되는 것이었다. [[1959년]]에는 [[영국]] [[오스틴 모터 컴퍼니]]의 기술을 들여와 개발한 승용차인 [[닛산 블루버드|블루버드]]가 인기를 끌면서 [[일본]] 자동차 산업의 앞줄에 다시 섰다. 블루버드는 1962년 [[새나라자동차]]에 의해 부품으로 들어와 [[새나라자동차 새나라|새나라]]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현대식 조립라인에서 생산된 첫 차가 되었다. [[파일:external/www.toyota.co.jp/0083_DatsunBluebirdModelP312.jpg|width=500]] 블루버드 P312(1962년) [[1966년]]에는 프린스 자동차를 경제성 주도 하에 인수하였고, 같은 해 [[멕시코]]를 시작으로 일찍부터 해외 진출을 시작했다. 1973년 오일 쇼크 이후 사람들은 작고 경제적인 차를 찾았고, 도요타, 혼다, 닛산 등 일본 자동차 회사는 세계적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닛산은 엔고(¥円高)와 관세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 직접 현지 완성차 공장을 짓는 공격적인 확장 경영을 펼쳤으며, 동시에 자사의 기술 우위를 자부하였는데, 이러한 자신감을 토대로 1985년에 901운동(901 Activity)을 발표하며 90년대 말까지 세계 1위 자동차 회사를 목표로 잡으며 막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그러나 판매와 생산 효율성 측면을 중시한 [[토요타]]에 실적에서 점점 뒤쳐져 갔다. 여기에 업친데 덮친 격으로 때마침 터져버린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버블경제]]와 경영진들의 안이한 경영으로 인해 부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예를 들자면 1997년에 [[르망 24시]]에 참가하기 위해 [[https://en.wikipedia.org/wiki/Nissan_R390_GT1|Nissan R390 GT1]]를 만들었다. 이 때 사는 단기로만 약 2조엔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R390는 1997년도에만 참전하고 1998년도에는 누가봐도 회사가 무너져가는 지라 참가하지 못했다.] 부채를 끌어다 쓴 닛산은 [[1990년대]]의 장기 불황을 맞아 적자가 누적되며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