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쓰충 (문단 편집) === [[호국전쟁]]에서 [[장훈복벽]] === 1915년 [[탕지야오]], [[량치차오]], [[차이어]], [[리례쥔]]이 [[호국전쟁]]을 일으키자 [[용제광]], [[장쉰]], [[펑궈장]], [[리춘]], [[돤즈구이]], [[루룽팅]]과 함께 연명으로 차이어, 탕지야오 토벌을 통전했다. 하지만 호국군의 세력은 날로 거세져서 위안스카이는 3월에 제제를 취소하고 호국군과 협상해야 했다. 니쓰충은 청나라의 복벽을 원했기 때문에 1916년 위안스카이의 죽음이 다가오자 쉬스창, 장쉰 등과 연락하여 선통제 복위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청실에서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이후 장쉰과 함께 위안스카이의 명을 받고 국내 안정을 명목으로 위안스카이를 임시로 대총통직에 유지시키기 위하여 난징회의를 개최하였으나 펑궈장이 아예 대권을 노리고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그외의 각 성의 대표들이 모두 위안스카이 하야를 요구하는 통에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1916년 6월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리위안훙]]이 총통이 되자 7월 6일 안휘성장에 임명되었으며 안휘독군 [[장쉰]]과 함께 독군단 회의를 개최, 성구연합회를 조직하여 리위안훙을 위협하고 [[돤치루이]]를 지지했으나 묘하게 돤치루이에게도 고분고분한 것은 아니라서 장쉰과 함께 수차례 독군회의를 개최하여 사법총장 장소증과 외교총장 [[탕사오이]]의 하야를 요구하면서 정부를 위협했고 결국 탕사오이 하야를 이끌어냈다. 이후 뇌진충, 장쉰 등과 함께 복벽에 대해 논했다. 1917년 [[부원지쟁]]의 결과로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해임되자 하남의 [[자오티]], 직예의 [[차오쿤]], 산서의 [[옌시산]], 산동의 [[장회지]], 섬서의 [[진수모]], 절강의 [[양선덕]], 복건의 [[리허우지]], 봉천의 [[장쭤린]] 등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고 돤치루이의 톈진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그러던 중 장쉰이 [[선통제]]를 복위시키는 [[장훈복벽]]이 일어나자 토역군남로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복벽을 진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