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뉴질랜드 (문단 편집) === 마오리족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마오리족)] Māori. 원주민인 마오리족의 인구는 2018년 기준 60만 명 정도이다. 여기에는 마오리 혼혈이나 본인의 정체성을 유럽계 및 다른 인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외되었으며 이를 합하면 10~15만명 정도는 더 포함된다. [[미국]]/[[캐나다]]/[[라틴아메리카]]에서 몰락한 [[아메리카 원주민]]과 옆나라 [[호주]]에서 사냥감 신세로 전락한 [[호주 원주민]]에 비하면 특이하게도, 뉴질랜드에서 원주민인 마오리족 주민은 나름대로 국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 많은 뉴질랜드인들은 이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각종 스포츠 경기를 할 때 뉴질랜드 대표팀은 경기 시작 전에 마오리족의 전투 춤인 [[마오리 하카]]를 추고 경기에 임하곤 한다. 백인들 역시 뉴질랜드의 문화로 마오리족을 받아들인 것. 이때 하카를 추는 행위를 영어로는 'dancing Haka'라 하지 않고 'doing haka'라고 표현한다. 또 [[마오리족]]은 뉴질랜드 왕을 겸하는 [[영국]] 여왕과는 별개로 [[https://en.wikipedia.org/wiki/M%C4%81ori_King_Movement|마오리족만의 왕]]을 섬기는데, 뉴질랜드 정부와 국민들도 영국 여왕과 함께 마오리족의 왕을 자국의 군주로서 우대하고 있다. 2021년 현재 마오리 왕은 [[https://en.wikipedia.org/wiki/Tūheitia_Paki|투헤이티아 파키]](Tūheitia Paki)다. 다만 당시 뉴질랜드가 마오리족을 받아들인건 그만큼 마오리족의 저항이 심했기 때문도 있었다. 씨족 단위로 생활하며 사냥과 채집에 의존하는 [[석기시대]] 수준으로 살고 있던 호주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아보리지니]]와 달리[* 심지어 호주 [[태즈메이니아]] 섬에 살던 원시인들은 대부분 멸망했다. 물론 백인들에게 죽어라 저항한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진작에 서구 무기로 무장한 마오리족들과는 달리 [[부메랑]]같은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한 탓에 마오리 전쟁 당시 영국과 마오리족의 사상자 비율은 745 : 2,154였으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백인과의 사상자 비율이 2,000~2,500:40,000이었다.], 금속을 사용하지는 않아도 부족 단위로 거주하며 [[농경]]을 했고[* [[찰스 다윈]]이 뉴질랜드에 왔을 때 마오리와 유럽인이 사는 아일랜즈 만 지역을 보고는 "이건 뭐 영국 풍경과 다를게 없네?" 라고 했을 정도.] 마오리족이 웬만한 백인들보다도 체구가 더 크며 힘 또한 장사인 [[전투종족]]이었기 때문에 싸움도 꽤 잘 했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포경선]]을 타고 찾아온 유럽인들과 교류를 좀 해 놓아서 유럽식 무기도 꽤 갖추고 있었고, 적어도 눈 뜨고 당할 만큼인 야만사회는 아니었다. 심지어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통일 마오리 왕국'''의 꿈을 가지고 돌아온 [[https://en.wikipedia.org/wiki/Hongi_Hika?wprov=sfla1|홍이 히카(Hongi Hika)]]라는 [[추장]]이 유럽 상인들에게 총을 사들여 뉴질랜드 통일전쟁을 시도했을 정도인데, 유럽 상인들이 그 추장의 경쟁자인 다른 추장에게도 총을 팔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이런 와중에 차츰 유럽인들의 세력 침투가 가속화되자 이에 경계심을 품은 전 [[마오리족]]이 단결, 19세기 중반에 약 10년에 걸친 '''마오리 전쟁'''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 마오리족의 인구는 10만에서 5만으로 줄었지만, 마오리족은 인구 면에서 뉴질랜드의 유럽인들에 크게 밀리지 않았고 이미 이 당시에 마오리족은 '''[[대포]]'''도 마련할 수 있던 수준이라 유럽인들이 마오리족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없었다.[* 물론 유럽인들은 자체 생산할 수 있었고 마오리들은 그걸 못했지만 - 할 수 있었다 쳐도 영국처럼 찍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고 찍어낸다 해도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경영하는 영국만큼 찍어낼 순 없었을 것이지만 - '''어디서든 꼭 돈되는 곳에 몰려들 사람은 있는 법.''' 무기를 팔 사람은 존재했다. --이이제이--] 결국 마오리족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여 이후부터 비교적 뉴질랜드 사회는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덩치가 크다 보니 [[스포츠]] 분야에서도 많이 활약하고 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등 전쟁이 터질 때는 [[군인]]으로도 명성을 날렸다. 오늘날이라고 마오리족들의 불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라, 뉴질랜드 거주 한국계 변호사의 책에서 사귄 마오리 친구들의 증언을 보면, 뉴질랜드도 마오리족 대우한다면서 은근히 보호구역으로 밀어두고 알짜배기 땅을 헐값으로 뜯거나 강탈했던 건 다를 거 없다고 분노하는 마오리족도 있는 모양. 실제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은 불평등 조약으로 역사에 남아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논란이 '오역'. 마오리어 번역본과 영어 번역본 두 개가 존재하는데 오역들 중 가장 유명한 게 바로 "주권"(sovereignty)과 "카와나탕아"(kawanatanga). 후자는 주권보다는 "지배"(governance)와 의미가 더 가깝다. 자잘한 평등사회 부족(iwi)들로 이루어져있던 마오리에게는 주권이란 말이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kawana는 영어 governer를 그냥 마오리어 발음으로 음차한 것이고 뒤에 붙은 tanga는 명사어미일뿐이라 애초에 번역자가 governership을 직역해서 만들어낸 단어이다. 이걸 마오리족들이 의도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천재다. 이런 이유로 마오리 측은 "모든 토지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백인 측은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이다"로 파악해 서로 토지를 놓고 싸웠다.] 아직도 이 조약으로 갈등이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 해외뉴스에선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뉴질랜드 총리가 연설하면 마오리인 단체들이 와서 '마오리인 차별 및 학살 사죄, 보상' 등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이는 마오리족들이 뉴질랜드에서 경제적으로 상류층은 아닌데서 오는 불만도 있어보이는데, 실제로 일부 마오리족들은 급속한 문명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낮은 교육 수준과 높은 실업률로 인해 술과 마약 중독 등에 빠져 사회문제화 되기도 하였다.[[http://mn.kbs.co.kr/mobile/news/view.do?ncd=149190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뉴질랜드에서 전통 문화하면 마오리족과 연관되는게 많은건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뉴질랜드 정부에서도 마오리족들을 포용하는 모습은 보이고 있다. [[제국주의]] 시절엔 [[탄압]]의 대상이었는데, 제국주의 시대가 저물고 나니 아이러니하게도 뉴질랜드의 [[상징]] 비스무리하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