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누사덕 (문단 편집) == 생애 == 정주(鄭州) 원무현(原武縣) 출신으로 젊은 나이로 진사에 급제하여 강도현위(江都縣尉)로 제수되었고 뒤에 감찰어사가 되었다. [[고종(당)|고종]] 상원(上元) 연간에 [[토번 제국]]이 자주 변방을 침범하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678년에 [[이경현(당나라)|이경현]]을 파견하여 토번 제국에 대응했지만 이경현이 원군을 보내지 않아 유심례(劉審禮)가 사로잡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태가 조정에 전해지자, 누사덕은 문관이었음에도 용맹한 군사들을 모았으며, 고종은 기뻐하여 누사덕을 조산대부로 삼고 토번 전선으로의 출정을 명했다. 누사덕은 조하(洮河)에서 패망한 장병들을 수습하여 전선에 나섰고 뒤에 토번 제국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토번의 장수인 논찬파(論贊婆)[* [[가르친링]]의 동생. 699년 [[치둑송첸]]이 가르 일가를 숙청할 때 가르친링의 명령으로 가르친링의 아들 [[가르궁린]]과 함께 당에 투항하고, 무측천에게 논씨를 하사받는다. 이후 죽자 안서대도호로 추증받는다.]가 적령(赤嶺)에서 누사덕을 맞이하자, 누사덕은 논찬파에게 당나라의 위신은 물론 토번과 당나라의 이해에 대해 개진하였다. 누사덕은 토번 제국에서 돌아와 전중시어사로 전임되었고 하원군(河源軍) 사마를 겸하며 둔전 사무를 담당하게 된다. 682년, 토번 제국이 하원군으로 침입해오자, 누사덕은 군대를 이끌고 토번 제국과 8번 전투를 벌이고 모두 승전하여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郞), 좌효위낭장(左驍衛郎將), 하원군 경략부사(經略副使)로 임명되었다. 무주가 들어선 뒤에 누사덕은 좌금오장군, 검교 풍주 도독으로 임명되고 다시 둔전 사무를 담당하였다. 692년에는 하관시랑, 판상서사(判尙書事)가 되었고 693년에는 동봉각난대평장사로 진위되었다. 이후 누사덕은 다시 하원군, 적석군, 회원군 및 하주, 난주, 선주, 곽주의 검교 영전대사로 전출되었다. 누사덕은 뒤에 입조하여 추관상서(秋官尙書)로 임명되고 원무현남(原武縣男)에 봉해졌다. 696년, 좌숙정어사대부, 숙변도(肅邊道) 행군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임명되고 [[왕효걸]]에게 종군하여 토번 제국의 장수인 [[가르친링]]과 소라한산(素羅汗山)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여 원주(原州) 원외사마(員外司馬)로 강등되었다. 다음 해인 697년에 조정에 복귀하여 봉각시랑, 동봉각난대시랑이 되었다가 이번에는 청변도(淸邊道) 부대총관(副大總管)이 되어[* 왕효걸이 청변도행군 소속으로 거란군과 싸웠으나, 소굉휘가 겁을 집어먹고 지원해 주지 않자 손만영이 이끄는 거란군에 의해 서협석곡에서 전사했다.] [[무의종]], [[사타충의]]와 함께 거란 전선으로 파견되었고[* 무의종은 조주에서 지레 겁을 먹고 거란의 병사들과 싸우지도 않고 상주로 도망쳤다.] [[이진충의 난]]이 진압된 이후 하북의 위무를 맡았으며[* 무의종은 난이 진압된 이후 손만영의 위협으로 그에게 협력한 하북 백성들을 전부 반역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들을 죽였다.], 조정으로 돌아와 납언이 되고 초현자(譙縣子)로 진봉되었다. 누사덕은 이후 농우(隴右) 제군대사(諸軍大使)로 임명되고 돌궐 제2제국이 침입해오자 검교 병주 장사, 천병군(天兵軍) 대총관(大總管)으로 임명되어 거란의 침공을 막아냈으며, 699년에 회주(會州)에서 사망하였다. 유주(幽州) 도독으로 추증되고 정(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