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누미디아 (문단 편집) === 분열과 멸망 === 기원전 88년 [[가우다]] 왕이 사망한 뒤, 두 아들 [[히엠프살 2세]]와 [[마스테아바르]]가 각각 누미디아 동부와 서부를 상속받았다. 기원전 82년, 로마의 반란군 지휘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숙청을 피해 아프리카로 도피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모은 뒤, [[히아르바스]]와 손을 잡고 가우다의 아들들을 권좌에서 몰아냈다. 기원전 81년 술라가 파견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도미티우스의 반란군을 제압하고 누미디아의 정치 체계를 원상복귀했다. 히엠프살 2세는 그 덕분에 누미디아 동부의 왕으로 복귀했고, 마스테아바르의 아들 [[마시니사 2세]]도 누미디아 서부의 왕으로 선임되었다. 기원전 60년 무렵 히엠프살 2세의 뒤를 이어 누미디아 동부의 왕위에 오른 [[유바 1세]]는 과거 누미디아인 마시니사를 부패 혐의로 고발했다가 마시니사의 변호를 맡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수염을 잡아당기며 모욕하자 깊은 원한을 품었다. 여기에 [[옵티마테스]]파였다가 카이사르파로 전향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기원전 50년 호민관을 맡으면서 누미디아를 로마에 편입시키자고 주장하자, 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쿠리오 역시 적대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기꺼이 폼페이우스의 편에 섰다. 기원전 49년 8월, 카이사르는 쿠리오를 아프리카로 보내 옵티마테스파를 축출하게 했다. 쿠리오는 [[우티카 전투(기원전 49년)|우티카 전투]]에서 아프리카 총독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를 격파했다. 이후 쿠리오가 우티카를 포위하여 굶겨죽이려 하자, 우티카 시민들은 항복하려 했다. 이에 바루스는 유바 왕이 대군을 이끌고 올 테니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던 중 유바 왕이 정말로 대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쿠리오는 포위를 풀고 카스트라 코르넬리아로 이동한 뒤 시칠리아에 주둔한 2개 군단에게 합류를 명령했다. 그러던 중 한 누미디아인으로부터 "유바 왕이 이웃 국가 마우레타니아의 침략에 대처하고자 본군을 이끌고 돌아갔고, 사부라가 이끄는 몇 안 되는 군대 만이 우티카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쿠리오는 이들을 물리치기로 마음먹고 재차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사실 이 누미디아인은 유바가 쿠리오를 유인하기 위해 보낸 밀정이었다. 쿠리오는 바그라다스 평원에서 목격한 사부라의 누미디아 분견대가 전부라고 확신하고 그들을 곧바로 공격했다가, 유바의 추가 병력이 당도하는 바람에 포위섬멸당했다.([[바그라다스 전투(기원전 49년)|바그라다스 전투]]) 이리하여 쿠리오를 끝장낸 뒤, 그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카이사르군을 붙잡은 뒤 몇몇 원로원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적병들을 처형했다. 이후 발칸 반도에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승리 소식을 알렸다. 이에 카이사르와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했다. 기원전 47년 카이사르가 아프리카에 상륙하자, 그는 옵티마테스파 총사령관으로 선임된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독자적인 지휘권을 인정해주고 아프리카에 있는 로마 영토의 일부를 자신에게 넘겨주면 그를 돕겠다고 밝혔다. 메텔루스의 동의를 받은 그는 군대를 총동원해 스키피오가 있는 우티카로 이동했지만, [[마우레타니아 왕국]] 군주 [[보쿠스 2세]]의 용병대장 [[푸블리우스 시티우스]]가 왕의 명령을 받들어 누미디아로 쳐들어가 수도 키르타를 함락시키고 [[마시니사 2세]]를 축출했으면 사로잡은 시민들을 전부 학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30마리의 코끼리만 스키피오에게 보낸 후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당시 스키피오에게 전력상 절대적으로 열세햇던 카이사르는 그가 돌아간 틈을 타 추가 병력을 규합해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후 사부라에게 누미디아 수비를 맡긴 유바 1세는 3개 군단과 누미디아 기병대를 이끌고 스키피오와 합세했다. 카이사르 역시 제9 군단과 제10 군단을 맞이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력에서 열세였던 카이사르는 우티카 공략을 포기하고 본영으로 돌아갔으며, 스키피오는 그를 추격했다. 이후 제타 마을 주변에서 양군은 대치했으나, 스키피오는 카이사르와 회전을 벌이는 걸 기피했다. 카이사르는 추가 병력을 규합하는 동시에 스키피오에게 회전을 제의했으나 그가 끝까지 거절하자 강제로 싸우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원로원파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도시인 탑수스를 포위했고, 스키피오는 탑수스를 상실하면 북아프리카의 원로원파에 대한 지지도가 추락할 것임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카이사르와 회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그와 스키피오 연합군은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와 맞붙었다. 이 전투는 카이사르의 완승으로 끝났고, 그는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함께 누미디아의 도시 자마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받아주지 않자, 누미디아 왕실 영지 중 한 곳으로 피신했다. 두 사람은 카이사르의 자비를 의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서로 결투를 벌이는 방식으로 자살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자신을 도와준 시티우스에게 키르타 일대를 영지로 삼게 하고, 나머지 누미디아 영역을 아프리카 베르타 속주로 삼고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를 초대 총독으로 세웠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로마가 혼란에 빠져 다른 곳에 신경 쓸 틈이 없게 되자, 히스파니아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유격전을 벌이고 있던 마시니사 2세의 아들 [[아라비오]]가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로 이동한 뒤 키르타로 진격해 푸블리우스 시티우스를 처단하고 누미디아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42년, 제2차 [[삼두정치]]는 아프리카 베투스 총독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를 숙청 대상으로 지정하고 아프리카 노바 총독 [[티투스 섹스티우스]]에게 그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코르니피키우스와 섹스티우스 모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처음에는 폼페이우스파와의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코르니피키우스 편을 들려 했지만, 아프리카의 정세가 삼두정치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걸 보고 섹스티우스 편으로 전환했다. 결국 코르니피키우스는 우티카 전투에서 전사했고, 섹스티우스는 아프리카의 두 지역을 장악했다. 기원전 40년 [[페루시아 내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가이우스 풀피키우스 팡고를 아프리카 노바 총독으로 삼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지지자인 섹스티우스와 대결하게 했다. 이때 그는 어느 쪽을 돕지 않고 중립을 택했지만, 팡고는 그를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하여 그가 다스리는 왕국을 침공해 강제로 몰아냈다. 그는 아프리카 베투스에서 섹스티우스와 합류했고, 두 사람은 곧장 아프리카 노바로 쳐들어가 팡고를 격파했다. 팡고는 언덕으로 달아났다가 야생 버팔로 떼가 돌진해오는 걸 누미디아 기병의 야간 공격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섹스티우스는 그가 처음부터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점을 들어 그의 충성심을 의심했고, 결국 사람을 보내 죽여버렸다. 이리하여 누미디아 전역이 로마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그 후 누미디아는 로마의 직할 통치를 받다가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가 유바 1세의 아들 [[유바 2세]]를 누미디아 왕으로 선임했다. 그러다 기원전 25년에 유바 2세는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마우레타니아]] 왕으로 전봉되었고, 누미디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유바 2세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결혼하고 충실한 봉신으로서 활동했다. 유바 2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마우레타니아)|프톨레마이오스]]는 서기 23년 마우레타니아 왕위에 오른 뒤 선정을 베풀어 마우레타니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지만, 서기 40년 [[칼리굴라]]에 의해 암살되었고 마우레타니아 역시 2개로 쪼개진 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기원전 25년 이후 로마의 속주로 존속하던 누미디아는 기원후 429년부터 [[반달족]]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로마의 세력권에서 이탈, [[반달 왕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으로 160년 정도 [[동로마 제국]]의 산하에 들어왔다가 그 후 150여 년이 지난 698년부터는 아랍인의 공세를 받아 이슬람권에 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