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농업 (문단 편집) === 농업의 기원 및 장점 === 이처럼 한계점이 넘쳐나는데도 이상한 것은, 1만년 전의 인류는 어떻게든 농경을 시작하고 확산시켰으며,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시작으로 [[황하]] 등의 전세계 (적어도) 12개소 이상의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농경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농업 사회와 수렵 채집 사회가 공존했던 지역에서는, 일부 수렵민들도 자기들끼리 나름대로 작물을 재배해보려고 노력한 흔적까지 발견된다고 하니, 당대에 농업은 확실히 첨단 기술로 여겨졌던 듯. 농업의 기원에 있어서 어째서 당시 사람들이 농업을 이처럼 좋게 평가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말끔하게 해결되지는 못한 문제이지만, 나름대로 몇 가지의 설득력 있는 학설들이 존재한다. * 당시의 환경 자체가 농업을 강제했다 : [[빙하기]]가 끝나고 환경이 바뀌면서 대형동물들이 줄어들었으며 여기에 인류가 가세하면서 대부분 멸종해버렸고, 이것은 인류의 입장에서도 심각한 자원고갈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인류는 당시 새롭게 발견되던 [[아몬드]] 등을 포함한 몇몇 식물종들에 관심을 돌렸고, [[곡물]]을 인류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는 실험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몇몇 야생 짐승들을 길들이려는 시도로 [[축산업]]이 탄생한 것도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이다. 한마디로 농경과 목축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진작에 당시 많은 빙하기 포식자들처럼 먹을 식량이 없어져서 멸종하거나 수가 급감한 채 개체수가 안정적으로 늘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구석기 시대]]처럼 수렵과 채집으로 생활하는 원시부족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은 얼마 되지 않는 소수 부족이다. 당연히 이들 소수 부족들과 농경, 목축을 거쳐 산업화된 대다수 문명인들의 개체 수와 규모 차이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 곡물의 뛰어난 저장성 : 식량의 보관 문제는 [[냉장고]]가 있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 했다. 고기나 과일은 금방 상해버리고, [[염장]] 또는 [[훈제]] 같은 저장법을 쓴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빨리 먹어버리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빼려고 노력하는 [[뱃살]]이 당시에는 유일한 에너지 저장방법이었다[* 사람이 굶주림을 비교적 오래 견딜 수 있는 이유이다. 즉 음식물의 섭취가 중단되면 체내 [[지방(화학)|지방]]을 연소시켜 에너지로 쓰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쥐]]만큼 신진대사가 활발했다면 살이 찔 건덕지도 없었겠지만]. 하지만 곡물은 씨앗의 '휴면' 개념을 이용하면 훨씬 오래 보관 할 수 있으며 인류에게 안정적인 식량자원을 제공할 수 있었다. 사회적 관점으로 보면 이 때문에 곡식을 세금으로 냄으로서 [[국가]]로도 발전할 수 있었다. 반면 기후상 곡물이 자라기 힘들고 대신 서류(감자류) 같은 뿌리·뿌리줄기에서 탄수화물을 섭취하는 식물을 주로 재배했거나 농업 자체가 힘들어 [[유목]]의 의존도가 높던 문화권은 저장성이 떨어지는 서류와 동물성 식품의 문제 때문에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체계나 대국가의 형성이 불가능했다. * 식량의 안정성과 질이 좋아졌다 - 이동을 하면서 수렵. 채집으로 식량을 조달한다는 것은 불확실성을 동반한다. 사냥개와 엽총으로 무장한 현대의 엽사들조차 몇 시간을 움직여도 공치는 경우가 허다한데, 창. 화살 정도로 무장했던 고대인들이 충분한 사냥감을 얻을 수 있었을까? 또한 종자개량이 안 된 야생 과일과 채소들에 비해 농업을 하면서 개량된 종들은 더 크고 맛이 좋아지고 영양도 높아졌으며, 야생동물의 고기나 부산물보다 가축의 그것이 덜 질기고 살이 많으며 누린내도 줄어 질이 좋아졌다. 또한 기생충이나 세균 감염 등의 위험도 줄어들었다. 수렵채집 시대보다 인구의 수가 늘어난 이유다. * 농업은 [[개인]]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집단이나 사회의 차원에서는 확실히 유리했다 : 결과적으로 보면 개인의 불행을 감수하면서 사회의 생존과 경쟁에서의 승리를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비록 여러 가지로 인생의 질곡들이 나타나기는 했어도 정착을 통한 [[출산율]]의 증가,[* 단순히 정착뿐 아니라 먹고 살 식량이 확보되니 출산을 해서 아이를 낳아도 적어도 못 먹일 우려는 덜어도 된다. 더욱이 정착하면 여럿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살고 필연적으로 사이좋게 지낼 수 밖에 없는데 이렇게 많이 모인 집단은 [[물량빨|집단 자체를 방어하는데도 유리할 것이고]].][* 과거 농경사회에서 동력을 사용한 농기계가 없던 시절에는 오직 가축과 사람이 농사일에 사용이 가능하였다. 가끔 수력이나 풍력이 물을 퍼내는 등의 제한적으로 쓰이는 정도.] 막대한 [[인구밀도]]를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 더욱 고도화하는 [[정치]] 시스템과 이를 통해 나타나는 의사결정의 고도화, 이동 반경의 단축, 정착기간 증대에 따라 출산의 증가 등 사회적 차원에서 굉장한 강점이 있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보면 사회에게 농업의 혜택 자체가 매력적이었다는 것. 농경에 발생에 대한 가설들은 환경과 인구의 압력에 관련된게 주류이다. 과거 수렵채집의 방식으로 환경의 변화나 인구 압력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 그래서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전이 과정에서 수렵채집이 주 활동이고 농경은 부수적인 활동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동식물 품종 개량 등을 통한 것, 종자를 심어놓고 수렵채집하다가 일정한 시기에 다시 되돌아와 곡물을 수확하는 형식.] * 안정적인 집단을 더 크게 확보할 수 있었다 : 자연 환경과의 대항에 있어서 사냥/채집 인류는 잘해봤자 먹이 사슬 중에서 상위에 올라가는 수준의 권력을 지닌 것뿐이었다면, 농경 사회로 인한 인구 증가와 사회 체제를 구축하고 나서 비로소 인류는 환경에 의해서 좌우되는 단계를 넘어 자연과 대립하면서 독립된 인류 집단 내부 환경을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부 변화나 급작스러운 위협에서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확률적 안전성, 유전자적 규모를 확보하게 된 것. * 농업을 시작한 집단이 무력으로 수렵채집하는 집단을 밀어내거나 흡수했다 : 개개인의 행복도는 떨어지고 영양상태도 안 좋아졌지만 어찌됐든 농업을 시작한 부족 및 사회는 머릿수에서 수렵채집인들을 누를 수 있었고 따라서 [[침략|무력으로 수렵채집인들을 몰아내거나]] [[노예]] 등으로 흡수가 가능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기존의 수렵채집인들도 안 밀려나기 위해 똑같이 머릿수 늘리기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겠지만,그 특성상 농업사회에 비해 한계가 있었다. 이 아래는 [[근동]] 지방에서의 농경 출현에 대한 가설들을 제시한 것이다. 찰스 R.레드만의 <문명의 발생>에서 나온 내용이며 책의 내용이 어렵기도하고 40년전에 나온 책이 40년 사이의 갭이 있을 수 있다. 이 부분을 읽을 사람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첫째, 근동지방은 식량의 생산과 도시의 형성이 다른 지역보다 빠르다고 여겨지고있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서구권]]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므로 근동지방에 대해 다룬다. 둘째는 '가설'은 '가설'일 뿐이란 것이다. 가설은 연구를 통해 한가지 완결된 결과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근동지방에서 이런 양상을 띄었을 것이다'는 아이디어 제출이지 정말로 그랬다고 확언하는 것은 아니다. * [[오아시스]] 가설 : 차일드의 오아시스 가설에 따르면, 최후 빙하기 끝무렵, 그러니까 기원전 10000년경에 빙하의 후퇴로 근동지방의 기후가 냉량습윤에서 고온 건조로 변화하게 됨에 따라 인간과 동물은 항상 물이 공급되는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식물은 물의 공급이 가능한 곳에 계속 밀집분포하였다. 인간이 동식물이 근접한 곳에 살게 됨으로써, 이들은 동식물의 행위와 연차적인 주기(life style)를 유심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두가지 변화가 생긴다. 첫째는, 강물에 의한 자연관개는 곡물들이 밀집해서 자라도록 하였고[* 반(半)유목생활일 가능성이 있다. 종자를 파종하고 그 지역을 떠나 생활하다 일정한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는 것] 이로써 [[추수|낟알들을 싣고 거두는데서]] 인간과의 공생관계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추수밭의 그루터기들이 동물들을 유인[* 특히 건조기에]하였고 이걸로 통해 동물들을 다른 동물로부터 보호하고 메마른 기간에 먹이를 줌으로써 [[축산업|인간과의 공생관계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기후의 건조화는 식량생산 경제를 채택하도록 자극하였다. 어쩔 수 없이 강가나 줄어드는 샘물의 주변에 모이게 되자, 토지를 비옥하게 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동물과 인간은 점차 사막으로 인해 고립되어 가는 오아시스 주변에서 함께 서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병렬관계가 사육으로 표현되는 동물과 인간의 공생관계를 조장했던 것이다.] 다만, 차일드가 말한 오아시스 가설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으로 사람들이 잘 따르지않는다. 차일드가 상정한 정도의 급격한 [[기후변화]]가 실재하였는지, 중요한 문화적 혁신이 과연 기후변화와 동시에 발생하였는지, 차일드가 상정한 지역에서 최초 농경의 증거가 나타날 것인가가 문제이다. * 핵심지구 가설 - 로버트 브레이드우드가 말한 핵심지구(nuclear zone) 가설의 기본 전제인 핵심지구란 최후 빙하기 말에 근동지방에서 개량의 잠재성이 있는 동식물의 야생종이 집중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그의 발굴단의 작업으로 과거 1만 2천 년 동안 근동지방에서 급격한 기후변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자연서식지구는 오늘날 동식물들이 야생상태로 분포하는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제한된 지역에 재배종들의 야생 선조가 존재하였다.(기후가 유사해 오늘날과 분포지는 비슷) [[식물]]을 이용하고 [[동물]]을 능률적으로 잡기 위해 기술이 발달하고 지역 정착의 시기에선 영구적인 공동체, 노동과 도구의 전문화가 이루어졌다. 기술의 발전과 식량자원의 확대는 이전에 비해 이동에 소모되는 시간을 현저히 감소시켰다. 인간이 제한된 지역에 정착하면서 동식물들을 이전보다 좀더 세밀하게 관찰할 기회를 갖게되었다. 따라서 인간과 재배 가능종 사이의 긴밀한 관계가 발달하고 식용가능 자원의 실험기간으로 최초의 농사실습이 이루어졌다. 이후 농사짓는 것을 잘 하는 농경촌락 공동체가 확립되었다. 핵심지구 가설의 근본적인 한계는 이 가설이 농경의 개시에 대해 아직 설명되지 않은 인간의 독창적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경이 하필이면 이 시기에 발생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가 바로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이다. 다만, 핵심지구 가설은 이후 연구자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상당하다. 그리고, 초기 농경의 증거를 보여주는 몇몇 유적들은 브레이드우드의 자연서식지구로 설명하기에는 고도가 너무 높거나 낮은 곳에서 발견된 바가 있다. 따라서 브레이드우드 발굴단이 제시한 정보들은 근동지방의 최후 빙하기 말에 급격한 기후변동이 있었다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즉, 근동지방 또는 이보다 넓은 지역이 기원전 9000년 이전에는 현재보다 춥고 건조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후변화 양상은 차일드가 제시한 것은 매우 상이해서 오아시스 가설의 가능성은 더욱 줄었다. * 신 기후변화 가설 - [[자그로스 산맥]]의 다양한 지형과 자원이 동물과 사냥꾼을 유인하였다. [[플라이스토세]][* 현재의 인류와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거의 없어진 시기] 말기에 기후는 점차 덥고 습해졌고 이에 따라 곡물들은 자그로스 지역으로 퍼졌고 사람들은 겨울철이 그다지 혹독하게 춥지 않게 돼 동굴에서 개활지로 옮겨갔으며, 동물들은 자그로스 지역에 남았다. 자그로스 산맥에서 식물자원 이동과 이에 따른 환경의 압력으로 야생종의 이종교배가 활발해졌고, 이들 중 일부는 농경에 매우 적합했다. 볕 잘 드는 지저분한 지역에서 최초의 곡물이 자라나고, 개활지에서의 정착이 사냥꾼들로 하여금 양이나 애완동물, 식용가능 동물들을 지키게하였다. 이러한 긴밀한 관계가 농사와 가축기르기로 발전하였다. 최후 빙하기 말에 발생하는 기후의 변화 이후에야 사육에 적합한 동식물과 가까이에서 인간이 서식하게 되었다는 연구결과의 이용여부가 신 기후변화 가설과 핵심지구 가설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신 기후변화 가설은 플라이스토세 말에 농경이 개시되는 생태학적인 근거는 밝히고 있지만 이런한 발전을 자극하는 문화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기후의 변화가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야생 동식물의 분포에 얼마 만큼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해서도 반론이 많이 제기되었다. * 인구압 가설 - 에스터 보스럽은 [[맬서스]]와는 달리 인구의 성장이 자체적 독립적으로 다양하게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고, 농경기술과 생산성 변화의 주요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식량생산 기술과 농경체계의 변화는 더욱 많은 생산을 위한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식량공급에서의 인구압 증가에서 기인한다는 것. 필립 스미스와 커일러 영 2세는 이러한 견해를 채택해 농경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가설을 구성했다. 기후가 좋아지는 데에 따라 식량공급이 충분해지자 플라이스토세 말기의 인구증가로 이어졌고, 집약적인 식량 생산(식물로의 전환)에 필요한 정착이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인구증가가 계속되었고, 식량 공급 증가의 필요성으로 인해 곡물의 밀집 장소를 인위적으로 늘려갔다. 그래도 늘어나는 인구로 휴경기간을 짧게 하고 기술을 증진시켜 집약농사로 바꿨다. 인구 증가는 계속돼 [[관개]]문명으로 이끄는 생산통제력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고 식량자원이 산재하고 있는 상황에 직면했을 경우에도 인간이 과연 다음해의 농경을 위한 종자를 저장 할 수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한 논란거리를 지니고 있다. * 주변지구 가설 - 루이스 빈포드가 제시하고 켄트 플래너리가 완성하였다. 근동지방에서의 농경이 동식물의 야생종 서식에 적합한 환경지역의 주변부에서 순환적인 인구압의 반응으로 발생하였다고 설명하고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