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농민학생연대활동 (문단 편집) == 개요 == 약칭 농활. 농번기에 [[대학생]]들이 [[농촌]]으로 가서 농사 일을 돕고 농민과 학생 사이의 연대를 다지는 행사이다. 흔히 "농촌봉사활동"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고 대학 밖의 사람들도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농민학생연대활동"이다. 왜 봉사라는 말 대신 연대라는 말을 쓰냐면, [[봉사]]라는 것은 '여유있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에 암묵적으로 사회의 계급을 인정하는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대는 '품앗이'와 비슷한 성격으로 농촌에 가서 그들과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계급적 성격에서 탈피할 수 있다. 다만 최근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 "농촌봉사활동" 성격의 농활을 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며, 농촌학생연대활동이라는 공식명칭 대신 '농촌활동'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그 시초는 [[소설]] [[상록수(소설)|상록수]]에서도 나타난 [[브나로드 운동]]과 같은 [[일제강점기]]의 농촌 계몽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시기의 운동은 인도주의에 기반한 봉사 운동에 가까웠기 때문에 현재의 농활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해방 후 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향토개척단의 운동 등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농활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농활은 농촌 문제의 본질과 해결책을 빈곤에서 보았다. 70년대 군부독재 시기에는 팀 단위의 농촌 활동이 있었다. 이는 당시 정부의 일방적 정책과 사회 구조의 모순이라는 배경에서 민중과 연합해서 사회 변혁을 꾀하고자 했던 학생들이 이끌었던 운동이었다. 이 시기의 농활은 팀 단위로 진행되어서 분산적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은 농활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80년대 대중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대중 운동으로서의 농활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이 시기에 농활은 팀 농활에서 총학생회 등의 기구가 관리하는 과 단위 농활로 변한다. 87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 출범하여 전국적 단위의 농활이 시행되고, 이후 전대협의 후신인 [[한총련]]과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연대 사업으로 농활이 추진되어 대학생의 연례 활동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시기에 농활에 참여한 대학생 수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연간 1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총련 주도의 농활은 농민 의식화 교육에 치중하여 농민들에게서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에는 학생이 농촌으로 가는 것만이 아니라 농민들이 학교로 와서 축제 때 일손을 거들거나 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연대 활동을 이루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학 사회의 탈 정치화와 운동권의 퇴조로 인해 학생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호응과 관심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대학 사회의 분위기 아래에서 농활의 성격도 변하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 농활은 농촌 계몽, 농촌-학생 연대의 의미보다는 농촌 봉사 활동으로서의 농활로 변모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한편 농활이 본래의 목적보다는 학생회 강화 등 다른 목적을 위해 변질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도 이 시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