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농노제 (문단 편집) === 유지되거나 강화된 국가들 === 주로 동유럽 국가들이나 독일이 이에 해당한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티베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조선의 노비도 농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조선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동유럽]]은 [[서유럽|서]]/[[남유럽]]과 달리 '''농노제가 오히려 강화되었다.''' 독일의 [[동방식민운동]]으로 개척된 북동부나, 그보다 동쪽은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의 수가 압도적이어서 사회적 변동도 적었고, 도시의 발달도 미약해서 농민들의 억압이 심해져만 갔다.[* 예를 들면 폴란드 농노의 경우 14세기에는 한 가구에서 일주일에 하루만 노동력을 제공하면 됐지만 의무가 계속 늘어나 18세기에는 한 가구에서 영주에게 일주일에 6일을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물론 가구 구성원들이 다 6일씩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었고 가구 구성원 A가 2일, B가 3일, C가 1일 이런 식으로 6일을 채우는 식이었다. 그래도 14세기에 비해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되는 노동력이 6배가 된 셈이니 농노들 입장에서는 가혹한 의무였다.] 러시아 제국 같은 경우는 아예 농노들을 도박 판돈으로 사용하는 지주나 귀족이 있었을 정도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다만 동유럽 국가도 * 일단 절대적인 자유민의 수 자체가 비교적 적었다.[* 논란이 있는 가설로 [[동방식민운동]]으로 유럽에 편입된 이래로 동유럽의 대부분의 민중인 슬라브족/발트족은 거의 다 농노로 편입되었고, 극히 일부 자유민과 귀족들은 거의 다 서유럽에서 유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다른 의견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같은 경우는 폴란드계와 리투아니아계, [[루스]]계가 귀족의 대부분을 이루었고 독일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폴란드계 귀족에 동화되었다. 독일계는 오히려 상인과 기술자로서 활약했다.] 게다가 상당 기간 동안 정세상 자유민의 수가 늘어나기에 좋지 않았다. 오늘날 크림 반도에 있는 [[크림 칸국]]이 이런 자유민들을 노예로 마구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농노로서의 삶도 결코 바람직하진 못했지만 그나마 최소한의 보호는 받을 수 있어서 불만이 덜했다. * 전통적으로 동유럽은 타 유럽 지역과 중동에 곡물 수출을 해왔는데, 이것은 동유럽 쪽에는 상업자본이 발달하는 기회가 상실되고,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에게 경제적 주도권이 주어지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 위 두가지 이유로, [[도시]]들이 발달하지 못했다. 또한 귀족들이 도시들에 끊임없이 견제를 해서 발달을 방해했다. [[한자동맹]]으로 대표되는 해안 도시들은 경쟁에서 패배하여 쇠퇴했다.[* 사실 동유럽이 처음부터 도시가 발달하지 않은건 아니다. 중세 초반만 해도 서유럽 국가들, 비잔틴 제국과 교역하면서 도시가 많았지만 십자군 전쟁으로 무역로가 바뀌고 몽골과 오스만의 침공으로 초토화당하면서 동유럽의 도시들이 몰락하고 만것이다.] * 반면 서유럽은 동유럽에서 유입되는 곡물로 인해 곡물가가 하락했고, 서유럽의 토지 귀족들은 장원의 경제적 가치가 하락했지만 도시들은 귀족에 대한 식량 의존도가 줄어들었다. 이것은 서유럽의 도시가 발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동유럽을 '서유럽 최초의 식민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13세기|13]]~[[15세기]] 이후 서유럽은 도시와 왕이 결탁해서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과 도시 경제와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하지만, 동유럽은 강력한 귀족 세력이 사회 주도권을 계속 가져 왕권의 발전도 미약하고 상공업과 자본주의 발전에서도 서유럽에 뒤쳐지게 된다. 프로이센의 경우 [[프리드리히 대왕]]이 1772년에 농노의 단독 매각을 금지시키는 등 농노제를 완화시키려는 움직임이 18세기 중후반에 있었지만 융커들의 대토지 경작[* 1800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중 2%를 차지하는 융커들이 전체 토지의 48%를 소유하고 있었다.]에는 농노가 필수적이다 보니 농노제가 강하게 존속되었다.[* S. A. Eddie(2013)에 따르면 1800년 기준으로 농촌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subject peasant였다. 이들의 신분은 자녀들에게 세습되었으며 토지에 종속되어져 있었고 거주의 자유 등 많은 권리들이 제한되어져 있었다. 결혼도 토지 소유주의 허가를 필요로 했으며 도망치다가 잡혔을시 다시 토지 소유주에게로 반환되었다. 이런 신세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금전적 대가를 지불해야만 됐다.][* 그리고 어차피 농노에서 해방이 되어도 자신의 소유한 농지가 없다 보니 다시 융커의 농노가 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대패한 후 내부적으로 개혁에 대한 요구가 강해져 결국 1807년에 농노제를 폐지하였다. [* 출처: S. A. Eddie, 2013, "Freedom's Price: Serfdom, Subjection, and Reform in Prussia, 1648-1848", OUP Oxford] 이 개혁은 나사우 공국이나 작센 왕국 등의 국가들에서 농노제가 폐지되는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문제는 토지의 다수를 융커들이 소유하고 있는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다보니 해방된 농노들이 자영농이 되는 것은 힘들었고 융커들이 소유한 대농장의 소작농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였기에 제대로 된 개혁이 아니었다. 러시아에서는 [[19세기]]까지 농노제가 존속했으며[* 사실 러시아만 이런게 아니라 중유럽과 동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18~19세기에 농노제가 소멸했다. 소멸 시기를 보면 왈라키아 공국의 경우 1746년, 몰다비아 공국은 1749년, 보헤미아 왕국은 1781년(완전한 폐지는 1848년), 바덴 선제후국은 1783년, 바르샤바 공작령과 프로이센 왕국은 1807년, 바이에른 왕국은 1808년, 나사우 공국은 1812년, 에스토니아는 1816년, 하노버 왕국은 1831년, 작센 왕국은 1832년, 오스트리아 제국은 1848년, 불가리아는 1858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791년에 농노제가 소멸, 러시아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다시 부활했다가 1864년에 완전히 소멸했다. 그리고 바타비아 공화국, 스페인 왕국처럼 18~19세기에 농노제가 소멸한 서유럽 국가들도 있다. 바타비아 공화국의 경우 1798년, 스페인 왕국은 1812년에 농노제가 소멸됐다.] 장원 제조장이나 우랄을 중심으로 하는 제철소, 여러 공방과 공장에 농노들을 보내 [[기업]]이 농노를 부리는 변질된 형태의 공장 농노제도 생겨났다. 이후,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하고 산업 혁명의 영향이 강해지면서부터는 향촌 지역의 농노들이 농한기에 도시 지역의 공장으로 가서 몇 달간 일하고 오는 일이 성행하게 되었다.[* 유사한 사례로 [[남북전쟁]] 이전 [[미국]]에서는 노예를 농장이 아니라 공장에 보내는 일이 잦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