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논공행상 (문단 편집) == 내용 == ||241년, [[손권]]은 [[전종]]을 대장으로 삼아 [[위나라]]의 회남(淮南)으로 출병하여 위나라 장수 [[왕릉(삼국지)|왕릉]]과 [[작피]](芍陂)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오나라 군사는 크게 패하여 진황(秦晃) 등 10여 명의 장수를 잃었다. 당시 고담의 아우 [[고승(삼국지)|고승]]과 [[장휴]](張休)의 두 부장(部將)은 [[수춘]](壽春)에서 작전중이었는데, 작피의 패전 소식을 듣고 즉각 구원하러 가서 위나라 왕릉의 군사를 저지하였다. 전종의 아들 [[전서(삼국지)|전서]](全緖)와 조카 전서(全瑞)도 오나라 군사의 부장으로서 종군하고 있었는데, 위나라 군사의 추격이 저지당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반격으로 전환하였다. 위나라 군사는 반격에 견디지 못하고 패주(敗走)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오나라]] 수도 [[건업]](建業)에서 "공적을 조사하여 상을 주었는데 각각 차이를 두었다[論功行賞 各有差(논공행상 각유차)]." 위나라 군사를 저지한 공을 갑, 반격한 공을 을로 하였으므로, 고승과 장휴에게는 정장군(正將軍)의 칭호를, 두 전서에게는 편장(偏將)의 칭호를 내렸다. 이 일로 전종·전기 부자의 고담 형제에 대한 원망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들은 손패를 통하여 손권에게 상신(上申=진언소)하였다. “고승과 장휴는 [[전군]](典軍) [[진순]](陣恂)과 친하기 때문에 전공을 그릇 보고하여 주군을 기민한 것입니다.”손권은 조사를 해보지도 않고 이 말을 믿고서, 장휴는 체포하고 고승의 처분은 보류시킨 채 고담에 대해서는 사죄를 받고 용서하기로 했다. 다음 날 고담에게 말하였다. “계씨(季氏) 고승의 건은 어떻게 할 셈이오?” 고담은 사죄는커녕 도리어 그릇된 상신을 믿는 손권을 책하였다. 손권은 노하여 [[고담(삼국지)|고담]]·[[고승(삼국지)|고승]] 형제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이 일로 인한 고담의 비분(悲憤)의 정을《신언(新言)》20편으로 엮어 썼는데, 2년 뒤에 그 땅에서 죽었다. 후자는 말한다. 논공행상이 공정하지 못하면 그 결과는 군신간의 신뢰가 떨어지고 신료(臣僚) 간에 암투(暗鬪)를 싹트게 하여 나중에 가서는 큰 분란(紛亂)을 초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