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녹화사업 (문단 편집) == [[한국]]의 녹화 사업 == [youtube(QCXrmsmEIoM)] 현재 남한에서 쉽게 보이는 나무가 울창한 산지는 웬만해서는 '''인공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험준한 산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산이 원래 '''민둥산'''이었다. 본래 [[한반도]]는 산지가 많아 산림이 울창하였으나 16~17세기를 거치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목재 수요도 따라서 증가하자 유럽과 동아시아의 각국 산림은 [[http://shaind.egloos.com/5373584|고갈]]을 바라보았다. 조선에서는 인구증가뿐만 아니라 [[자염]] 생산과 [[온돌]] 대중화로 장작 수요가 급속히 많아져 더더욱 산림 자원 고갈에 시달렸다. 18세기의 조선에서 산림 소유권을 둘러싼 송사인 산송(山訟)이 증가하여 조선 정부도 산림을 보호하려고 [[금산#s-1]](禁山)을 정하여 규제하였고, 정부 주도로 [[비변사]]와 각 지방 군관을 동원하여 대규모 나무 심기를 시행하였다. [[http://egloos.zum.com/sldn84/v/2697424|#]] [[1788년]]에는 소나무를 보호하고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8248&cid=46631&categoryId=46631|송금사목]]이란 법을 제정했다. 문제는 이러한 규제와 나무 심기에도 급증한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조선 말기부터 도시 주변의 산림 자원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미국과 중국 및 유럽과 일본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으나 미국과 중국은 유럽과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아도 그 이상으로 땅이 드넓어 산림 자원이 매우 풍부했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유럽은 기타 해외 식민지에서 목재를 약탈하고 석탄 사용을 대중화하여 목재 사용을 줄임으로써 해결하였다. 일본도 홋카이도를 개척하여 목재를 공급하여 문제를 넘겼다. 사실 유럽과 일본은 [[연중 강수 기후|강수량이 1년 내내 고르기]] 때문에 굳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적인 산림 회복이 수월한 편이었다. 그러나 [[한반도#s-5.1]]는 가을부터 봄까지 사실상 비도 눈도 거의 오지 않는 [[건조기후]]에 가까웠으므로 나무를 심어만 놓는다고 쉽게 자라지 않는 환경이라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번식력 강한 나무를 도입해야 했다. 그래서 번식력이 강한 [[아까시나무]]를 많이 심어서 빠른 속도로 전국에 퍼졌다. 아까시나무를 심기 전에는 밀도가 매우 감소하여 말만 숲이지 나무가 거의 없어 흙과 돌이 맨살을 드러낸 [[민둥산]]이었다. 녹화사업 이전에 한국에서 숲이 숲답게 남은 곳은 [[지리산]]이나 개마고원의 깊은 안쪽처럼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운 지역일 뿐, 그 외에는 흙과 바위와 잡초만 있을 뿐이었다. 독일의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 1870~1904)는 당시 조선의 민둥산을 보고 저서 <신선한 나라 조선 1901>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한양)을 내려다보면 헐벗은 산림으로 암담하고 황폐한 모습이다. 특히 나무 하나 없는 산봉우리는 비바람에 마모돼 마치 서울이라는 도시를 사납게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이 도시는 500년 동안(조선 건국 초부터) 끊임없이 벌목을 했으니 지금 이렇게 완전히 헐벗고 황폐화한 것이다. 하지만 강원도와 함경도의 깊은 산골에 울창한 삼림이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예전엔 이곳도 울창한 숲으로 우거져 있었을 것이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한반도 내의 산림 분포의 조사를 위해 제작한 조선임야분포도에서도 험준하여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민둥산이라고 나온다. [[https://www.yna.co.kr/view/AKR20090908123300063|관련 뉴스]] 게다가 태평양 전쟁시 [[국가총동원법]]으로 그나마 있던 나무조차 대량 벌목하면서 산지 황폐화가 더욱 가속화되었고[[https://scholar.google.com/scholar?cluster=11554337059117270741&hl=ko&as_sdt=2005&sciodt=0,5|#]][[https://dspace.ewha.ac.kr/handle/2015.oak/191548|#]] [[아사카와 다쿠미]] 같은 임업가가 한반도를 녹화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youtube(kdUmKT6ZZ8g)] 광복 후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은 [[식목일]]을 지정, 여러모로 산림녹화를 시도하였지만[* 산림보호임시조치법([[1951년]] 제정)을 공포하고[[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4726155|#]],석탄개발공사를 세웠으며, 유연탄 도입 5개년 계획(상공부, 1955년 7월 3일 성안) 등 당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원조로 받은 밀가루를 녹화사업에 참여한 주민들에게 대가로 주는 방식으로 했다. 어떤지역에 할당된 묘목을 다 심으면 다른 곳에도 심어야 하는데, 주민들이 가족이 굶고 있으니 일거리를 더 달라며 공무원에게 애원하는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니 묘목을 다 심어도 그걸 가꿀 여유가 없으니 제대로 되진 않았을 수밖에 없다. [[윤흥길]]의 소설 <땔감>이 이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다.] 가정용 연료의 목재 비중이 80%에 달하는 이상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다. [[https://theme.archives.go.kr//next/forest/policy/startBefore.do|상황]] 특히 [[한국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산림이 파괴되었으며, 이후에도 전후 복구와 난방을 위해 목재가 많이 필요해 그나마 남아있던 깊은 산의 나무들까지 벌목되었다. 당시 UN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산림이 복구될 수 '''없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그 뒤 1960년대 초기에도 몇몇 법제적 변화[* 사방사업법 개정([[1962년]]), 화전정리 법률 제정([[1966년]])]를 제외하면 산림녹화는 지지부진하였지만, 1960년대 중반에 [[박정희]] 정권이 산림녹화에 강력한 행정력을 투입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youtube(aLb2OKiKUGA)]||[youtube(YyS0rs47TN8)]|| 가장 먼저 한 것은 석탄개발사업이었다. 박정희는 나무를 심는 데 쓸 예산을 석탄개발에 썼다. 그 예산을 준 [[월드비전]]에서는 당연히 예산을 오용하는 것으로 보고 반대했지만, 정권은 '먼저 난방부터 해결이 되어야 있던 나무라도 땔감으로 사라지지 않을 것 아니냐.'라며 밀어붙였다. [[1967년]]에 [[농림축산식품부#s-2|농림부]] 산림국이 산림청으로 발족되었고, 1973년엔 내무부 [[산림청]]으로 이관,[* 지금으로 말하면 [[농림축산식품부]] 소속에서 난데없이 [[행정안전부]] 소속으로 변경된 것. 녹화사업에 경찰/소방행정력을 더하고, 관선 지자체장 시절에 내무부가 직접 관할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일손까지 총동원하기 위함이었다.] [[새마을운동]]과 연계되었다. 이 당시에 [[산림청장]]을 맡은 사람이 [[손수익]]으로, 관선 경기도지사를 역임하고 새마을운동 창안에도 관여한 실세였다.[* 본인 회고록에 따르면 뜬금없이 산림청장을 맡아 좌천되었다고 생각하였으나, 산림청이 내무부 산하로 이관되고 박정희가 [[김현옥]] [[행정안전부장관|내무부장관]]이 직접 업무를 감독하도록 하는 것을 보고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시도별 산림과나 녹지과가 국으로 승격되었고, 영림과와 식수과가 신설되기도 했다. 또한 이 당시 지방의 공무원이나 군인들이 벌목업자와 결탁해 도벌(盜伐, 나무를 몰래 베는 것)을 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정부는 이를 '인간송충이'라 매도할 정도로 중요한 사회악으로 간주하고 강력히 단속했다. 거기에 행정도 매우 치밀해서 지방 공무원들에게 나무 심으라고 할당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인센티브와 승진심사의 점수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삼림을 조사하는 검목관 공무원들은 타 지방 지자체끼리 검사를 시켰다. 그리고 삼림정책의 가장 큰 적인 [[화전(농업)|화전]]을 근절시켰는데, 화전민촌 강제철거 같은 탄압만 한 것이 아니라 화전민 자녀를 [[초등학교|국민학교]]에 보내고, 집을 지어주는가 하면, 양봉 등의 임업교육, 기타 직업교육 등을 통해 화전민이 더 이상 숲을 파괴할 동기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정책을 집행했다. 이로 인해 녹화 사업은 명과 암이 공존한다는 비판이 있으며, 강력한 전체주의 통치자의 집권기였기에 가능했던 정책이다. 국가의 녹지를 풍부하게 한다는 명분 아래 화전민은 일정 금액을 받고 산에서 쫓겨나야 했다. 예를 들면 국가는 1973년에 [[칠갑산]]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고, 거기에 거주하는 화전민에게 20만 원을 주고 강제로 내보냈다. 1970년대에는 [[1982년]] 전국토 녹화를 목표로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식목일]] 행사를 [[식수#s-2]]기간으로 확대해 지역별로 기후에 알맞은 날짜에 나무를 심는 등 노력하여, 목표기간을 4년 단축한 [[1978년]]에 1차 계획을 종결하고 2차 계획으로 넘어갔다. 1970년대 말에는 해풍(海風)+돌산으로 나무가 자랄 수 없는 곳으로 간주받던 [[포항시]]까지[* 당시에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영일만]] 상공을 비행하던 박정희가 집중적으로 관리하라 지시하였다.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인들 보기에 한국의 첫인상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이유였다.] 녹화사업이 완료됐을 정도이다. 당시의 포항 영일지구는 토양이 모두 침식된 채 암반층만 남아 노출된 상태로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없었던 지역이다. 이 가파른 암반층에 허리에 줄을 묶고 인부들이 올라가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퇴적암반이 풍화되게 한 뒤에 풀을 베어 만든 거름을 섞어 나무를 심고 가물면 물을 길어다 주고 매년 비료를 주는 등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산림이 복원되었다.[* 이후 흥해읍에 녹화사업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사방기념공원을 조성했다.]관련 기록은 [[국가기록원]]에서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1869&pageFlag=&sitePage=|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 정부에서는 [[그린벨트]] 제도를 도입해 과도한 도시화로 말미암는 산림 파괴를 방지하였다.[* 의외로 그린벨트 도입에는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 개발을 억제하고 지방도시를 발전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 사업을 지시한 박정희는 국립수목원의 '숲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이 명예의 전당에는 총 6명이 올라갔다. 박정희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다음과 같다.[* 출처 - [[https://www.forest.go.kr/kfsweb/kfi/kfs/cms/cmsView.do?mn=NKFS_03_13_03_06_02&cmsId=FC_000179|국립수목원 홈페이지]]] * [[현신규]](玄信圭, 1911 ~ 1986): 은수원[[사시나무]] 개발자. 해당 문서로. * 김이만(金二萬, 1901 ~ 1985): 이 땅에 자라는 나무 종자를 수집하고자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국토의 구석구석을 누빈 '나무 할아버지'. 1922년부터 64년 동안 수목표본 수집과 종자 시험에 몸을 바치며 노력한 덕분에, 주요 조림수종의 종자품질기준이 정하고 각 지역에 알맞은 나무를 골라 심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민병갈]](Carl Ferris Miller, 1921 ~ 2002): 전직 미 해군 대위. [[1962년]]부터 4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남 [[태안군]]의 산림을 1만 300여 식물종이 사는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시아 처음이자 세계 12번째로 국제수목학회에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받은 천리포수목원을 조성하였다. [[1979년]]에 한국인으로 귀화하였다. * 임종국(林種國, 1915 ~ 1987): 1950년대 종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전남 [[장성군]]의 임야 54헥타르를 제일가는 조림성공지로 만들었다. 이 공로로 [[1966년]]에 식산포장(殖産褒章)을, [[1970년]]에 철탑[[산업훈장]]을, [[1972년]]에 [[5.16 민족상]]을 수상했다. * [[최종현]](1929-1998): [[SK그룹]] 회장 1980년대에는 [[유한킴벌리]]가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1984년)을 주도하여 민간단체의 녹화사업이 활발해졌다. 1998년 생명의숲 국민운동, 1999년 평화의숲, 동북아산림포럼, 2000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2003년 서울그린트러스트 같은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자체에서도 1996년 [[대구광역시]]의 푸른대구가꾸기 등의 도시녹화사업을 이어갔다. [[최종현]] [[SK그룹]] 회장은 [[활엽수]] 단지 조성과 조림지를 교육기관에 기증하고 임업 교육에 힘쓴 공, 그리고 사후에 [[화장(장례)|화장]]을 하고 화장 시설을 만들어 장례로 인한 산림 훼손을 줄인 공으로 2010년 새롭게 헌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