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천명 (문단 편집) == 생애 == 개명 전 원명은 노기선(盧基善)이며 [[황해도]] [[장연군]](長淵)에서 아버지 노계일(盧啓一)과 어머니 [[의성 김씨]] 김홍기(金鴻基) 사이의 딸로 태어났다. 1930년 3월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여 1934년 봄에 졸업하였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해 학예부 기자로 4년간 근무하면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사슴>을 발표하였다. 1938년에 조선중앙일보를 퇴사해 [[조선일보]]의 학예부 기자가 되었으며 그 뒤 4년 동안 조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여성(女性) 지의 편집인이 되어 여성지 편집을 맡아 보았다. [br] ||{{{#!wiki style="text-align: center" {{{+2 '''사 슴'''}}} {{{-2 노천명}}}}}}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 친일 문화 단체인 '조선 문인 협회'에 가입하여 전쟁을 찬양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선동하는 시를 발표하였다.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문화부 기자가 되어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노래하자 이날을',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 다수의 친일 시를 발표했다. 노천명의 대표 친일시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가 있는데 아래가 그 내용이다. ||남아면 [[군복/일본군|군복]]에 [[아리사카|총]]을 메고 [[일본 제국|나라]] 위해 [[태평양 전쟁|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반자이 어택|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대동아 공영권|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귀축영미|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등에 강사로 나가 출강하였으며 후에 부녀 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기도 하였는데 1946년까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있었다. 1949년에는 몇 편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난하지 못한 노천명은 [[월북]]한 [[임화]], [[김사량]] 등이 주도하는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 궐기 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특별시|서울]]을 수복한 뒤 [[좌익]] 분자 혐의를 받아 징역 20년을 선고받으나 여러 문인들의 도움으로 몇 개월 만에 사면하여 풀려났다. 이후 공보실 중앙 [[방송국]] 방송 담당 촉탁에 임명되기도 하고 3차 시집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지만 무리한 집필 활동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1957년 재생 불능성 뇌빈혈로 사망했다.[* 노천명의 시신을 수습한 법관 김홍섭(1915년~1965년)의 회고에 따르면 몇 권의 책과 앉은뱅이 책상 외에 변변한 가재 도구도 없는 손바닥만 한 낡은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 [[교회]] 신자들이 수습해 줬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