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예무역 (문단 편집) === 이슬람의 노예무역 === 피부색에 상관없이 백인 노예도 매우 많았다. 흔히 노예무역하면 대항해시대 때 흑인 노예를 사고팔던 대서양 노예 무역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중세 국제적인 노예 무역은 무슬림 세계를 중심으로 돌아갔으며 근세 대서양 노예무역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크림 칸국]][* 크림 칸국에서는 약탈자들에게 군마를 빌려준 후에 약탈자들이 납치한 노예를 이자로 받는 비즈니스가 번성했었다 한다. 밑천을 '투자'하고 배당금을 받는 것. 출처: 우크라이나의 역사 /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허승철 역)]의 노예 무역은 유례가 없이 악질적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무슬림]]이 같은 무슬림을 노예화하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중세부터 노예 무역이 번창했다. 또한 아라비아 반도 바로 아래에 아프리카의 뿔이 있기 때문에 대서양 노예무역처럼 수입해오기 좋았다. 무슬림들이 직접 약탈한 지역에서 납치해 온 노예들도 많았지만, 중세 초에는 [[하자르]]인들이나 [[노르드]]인들이 사로잡은 노예들을 수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그마치 900년에 걸쳐 이어진 아랍인들의 노예무역 과정에서 사망한 노예들의 수는 적게는 400만에서 많게는 1800만에 이른다 추정된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로 부려먹을 흑인을 수입해 간 유럽이나 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아랍 국가들은 주로 노예 군인 [[맘루크]]나 [[하렘]]에서의 [[성노예]]로 쓰기 위해 노예들을 끌고 갔다. 이 때문에 대서양 노예무역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비가 2대1이라고 하나, 이슬람권 노예무역에서는 그 반대이다. 일례로서 메소포타미아와 남부의 습지를 개간하는 일이 모기 때문에 지장을 받자, 압바스 왕조에서는 아프리카에서 수입해온 흑인 노예들을 투입해 이 지역에 개간 사업을 진행했다. 무덥고 건조한 환경에 모기가 전파한 전염병 때문에 많은 노예들이 과로로 죽자 결국 이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잔즈 반란]]을 일으켰다. 아랍 노예무역의 희생자 중에는 흑인보다는 백인이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흑인 노예보다는 백인 노예가 더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근세 오스만 왕조 기록을 보면 크림 타타르인들이 사로잡은 [[체르케스인]] 여성 노예는 500 파운드 스털링[* 영국 화폐로 당시 오스만 왕조 경제가 만신창이가 돼서 고액 거래에서 유럽산 화폐를 신용하는 편이었다.]에 '''거래'''되었으나, 흑인 여성의 경우 20파운드 스털링에 거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슬람 율법에서는 같은 무슬림을 노예로 잡는 것을 금지하였고,[* 다른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채무를 갚지 못한 사람이 노비가 되는 경우가 흔해서 굳이 노예를 다른 지역에서 수입할 필요가 없었던 나라들이 많았다.] 이는 이슬람권에서 노예 무역이 번창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근세 [[크림 타타르]]인들의 경우 이를 무시하고 체르케스인들을 노예로 납치하였던 경우, 레반트 지역의 베두인들이 농촌에서 부녀자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판매한 사례 등등 예외도 넘쳐났다.[* 노예무역의 사례와는 해당되지 않지만 중세 [[바그다드]]에서도 범죄 조직들이 고아들을 납치해서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앵벌이로 부려먹었던 역사가 있다.] 중세 초 유럽의 전쟁 포로들 중 기독교인이 아닌 [[페이건|다신교를 믿는]] 부족[* 주로 동유럽의 슬라브족과 발트해 근방의 [[발트족]], [[우랄어족|핀족]]이 [[동방식민운동]] 과정에서 포로가 된 경우]이 포로로 잡히면 대부분 노예 수요가 많았던 이슬람 국가들로 수출되었으며, 노르만인들 역시 해적 행위와 약탈 과정에서 사로잡은 노예들을 대부분 이슬람 국가들에 수출했다. 961년 [[후우마이야 왕조]] [[코르도바(스페인)|코르도바]] 궁정에는 1만 3000명의 슬라브인 노예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들은 오늘날 프랑스 동북부에 위치한 [[베르됭]]에서 유대인 상인들에 의해 후우마이야 왕조 치하의 [[알 안달루스]]로 팔려왔다. 후우마이야 왕조가 붕괴되자 슬라브인 군인 노예들은 군벌을 이루고 스페인 각지에 이슬람 타이파 국가들을 세웠다. 중세 아랍어에서 내시를 뜻하는 '시끌라비'는 슬라브인 노예를 의미하는 '사깔라바'란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사깔라바라는 단어 역시 고대 슬라브족의 일파 스클라베니족에서 기원한 어휘이다. [[프라하]] 역시 중세 초에는 이슬람 국가들에게 노예를 수출하는 거점으로 유명한 도시였다고 한다.[* [[프라하]]는 [[독일]], [[폴란드]]와 가까운 위치로 중세 초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살던 이교도 슬라브 부족 폴라비아인이 전쟁 포로로 사로잡히면 대개 [[프라하]]를 통해 [[중동]]으로 수출되었다.] 중세 초에는 카프카스 근방의 쿠만족과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을 비롯해서 텡그리를 신앙하는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다른 튀르크계 부족과 싸우다 패배해 포로로 잡히면 군사 노예 [[맘루크]]로 매매되었는데, 이들이 아랍인 군인들과 유혈 충돌을 일으키면서 튀르크인 부대와 아랍인 부대를 따로 분리한 것을 시점으로 군사력을 장악하고 군벌화되었다. 이들 튀르크계 군인 노예들은 11세기 이슬람으로 개종한 셀주크 튀르크인 동포들을 끌어들이고 아랍인들을 밀어냈으며, 그 결과 중동의 패권은 아랍인에게서 튀르크인들로 넘어간다. 심지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아랍인들이 갑옷을 입을 권리와 말을 타고 다닐 권리를 박탈하기도 했다. 중세 말 흑사병의 유행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부유한 도시 국가들이 인구가 감소하며 타격을 받자 14세기 말을 기점으로 [[제노바 공화국]]에서 흑해의 무슬림 타타르인들로부터 슬라브인[* 물론 다 슬라브인은 아니었고, [[크림 반도]]의 그리스인과 고트족, 볼가 강 유역의 핀 우골 민족들이 포함되었다.][* 반면 같은 타타르인들과 전쟁 와중에 사로잡힌 타타르 전쟁 포로나 산악 지대에 살며 기골이 장대한 [[체르케스인]]들은 이탈리아 대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의 군인 노예로 더 비싼 가격에 수출되었다. 이탈리아의 중산층 사이에서는 가사 노동을 시킬 여성 노예의 수요가 많았던 반면 맘루크 왕조에서는 군인으로 쓸 노예가 주로 필요했던 것] 노예를 수입했다. 한 때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의 중산층들이 집집마다 노예를 한두명씩 둘 정도였으나,[* 오늘날 이탈리아어 인사말 Ciao는 본래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노예들이 주인에게 쓰던 인사말 Suo Schiavo(저는 당신의 노예입니다.)가 어원이라 한다.] 오스만 제국의 등장으로 제노바의 [[흑해]] 식민지들이 함락되면서 이탈리아 노예 시장의 주 공급처는 아프리카 서부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포르투갈의 대서양 항로 개발을 촉진시키며, 상술된 대서양 노예 무역의 시발점이 되었다. 원칙적으로 무슬림이 다른 무슬림을 노예로 잡는 행위는 이슬람 율법에서 금지된 행위였으나 크림 타타르인들은 이웃한 체르케스인들이 15~16세기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습격하여 이탈리아나 오스만 제국으로 인신매매하였다.[[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485444?sid=104|#]] [[마그레브]] 지역의 이슬람 해적([[바르바리 해적]])들은 중세 초부터 해적 행위와 약탈로 유명했지만 [[오스만 제국]] 정부의 영향권 속에서 자치를 누리며 지중해 지역의 기독교 신자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납치해서 노예로 팔았는데, 이는 19세기까지 유럽 국가들의 주요 골칫거리 중 하나였기에 수많은 서구 국가들이 이들의 [[해적|해적질]]을 근절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이슬람 해적들은 전성기에는 교황을 공격하고(교황은 한밤중에 말타고 혼자 튀어서 겨우 살았다), 사보이아 공작 일가를 사로잡고, 아일랜드와 북미까지 약탈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현재 가톨릭 봉사단체로 활동하고 있는 [[구호기사단]]의 경우 이 당시에는 휘하 병력을 동원해 바르바리 해적들을 공격하고 기독교도 노예들을 해방하는 일이 주 업무였으며,[* 단 이들 또한 포로로 잡은 이슬람 신자들을 유럽 국가에 팔아치우는 행위를 많이 자행했다. 그들의 근거지 중 하나였던 [[로도스 섬]]이 주요 노예무역 기지였을 정도로, 이는 기사단의 거대한 사업이자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대서양 너머 위치한 미국 또한 자국 선원들이 나포된 것을 계기로 수군을 보내어 리비아 지역의 해적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이라는 강대국을 후견인으로 둔 이 해적들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근세 오스만 제국 [[크레타 섬]] 하니아에서 나온 기록에 따르면 노예의 평균 시세는 65에서 150[[쿠루스]]였는데 1717년 12살에 정신지체 장애를 앓는 소년이 27쿠루스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27 쿠루스는 당시 시세 기준으로 양고기 462kg, 혹은 빵 933kg 아니면 우유 1,385리터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1671년에 거래된 노예 처녀는 350쿠루스에 거래되었는데 당시 2층짜리 건물 하나의 가격이 300쿠루스였다. 그들의 납치 행각은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환자라 불릴 정도로 약화되고, [[나폴레옹 전쟁]] 종전으로 한숨 돌리게 된 유럽 국가들이 압도적으로 강대해진 해군력을 바탕으로 토벌전을 벌인 이후에야 사라졌다. 특히 프랑스가 1830년에 북아프리카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프랑스령 알제리]]로 만들면서 바르바리 해적들의 노예무역도 끝났다. 한편 오스만 제국 북쪽에는 [[몽골 제국]]의 후계 국가들이 존재했는데,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 '''[[크림 칸국]]''' 등이었다. 이들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을 침공해 엄청난 숫자의 노예들을 사로잡고 마구잡이로 노예를 매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이들 칸국에 대한 원한이 강했으며 러시아의 동방 국경은 늘 위험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를 집어던지고 국력을 강화하자, 칸국의 노예 사냥은 정당한 전쟁 명분이 되어 [[이반 뇌제]]의 치세에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은 러시아에 정복당하고 만다. 당시 이반 뇌제가 카잔을 함락했을 때, 10만의 러시아인 노예를 해방시켰다고 하니 당시 슬라브인 노예 사냥과 매매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크림 칸국만은 오스만 제국과의 굳건한 동맹 때문인지 18세기 말까지 존속했다. 우크라이나 남부와 크림 반도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이 유목민 국가는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으며 동유럽 지역의 기독교도 신자들을 잡아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을 주된 수입원으로 삼았다. 그들의 활동 범위는 매우 넓어, 한때는 발트 해와 인접한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마저 위협했을 정도였다. 그들은 젊은 여성은 잡아다가 성노예로 팔았고, 아이는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말로 밟아 죽였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남부 드네프르 강 일대는 비옥한 지역([[체르노젬]]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살지 않아 황량한 평원으로 남게 되었다.[* 실제로 이 당시를 그린 지도를 보면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은 'Wild Fields(야생 벌판)'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러시아]]를 위시한 동유럽 지역에 [[농노제]]와 억압적인 분위기가 고착화된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주민들이 노예로 팔리느니 차라리 지주와 미르[* 마을 공동체.]에 예속되어 농노로 남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주 밑에서 살기를 거부한 일부 루스인들은 남부 황무지로 들어가 군사적 공동체를 만들고 크림 칸국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코사크]]다. 크림 칸국의 노예 무역은 강대해진 러시아가 18세기 말에 크림 반도를 합병하면서 끝났다.[* 이후 칸국의 주요 민족으로서 동유럽 지역에서 노예 무역을 주도하던 [[크림 타타르]]는 러시아에 의해 핍박을 받으며 모진 삶을 살아야 했다.] 또한 오스만의 직간접 지배지였던 헝가리, 세르비아 등의 동유럽 지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고, 이는 남슬라브족들의 분열을 가속화해 20세기 말까지 이어지는 발칸의 민족문제를 만들어냈다. [[카프카스]] 지역 또한 중동 이슬람권에 바로 인접한 특성상 중세 한동안은 자연 증가하는 인구 대부분이 노예로 [[인신매매]]되었다. 일례로 [[사파비 왕조]]는 순니파 무슬림들을 쉬아파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순니파들의 봉기하자 [[조지아인]]과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들을 납치하여 쉬아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후 각지에 주둔시켜 봉기를 제압하였고 이를 계기로 카프카스 출신 노예병을 주력으로 삼았다. 왕실과 귀족들의 후궁 대다수 역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인 노예로 충당했다 한다. [[카프카스]] 역시 러시아 제국이 이 지역에 남하하여 [[카자르 왕조]]를 몰아내고 패권을 다짐으로서 노예 납치 및 무역이 근절되었다. 노예 무역을 금지되면서 노예 공급 및 수요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카프카스의 여러 부족들이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되어서 러시아 제국과 대립하기도 했다. 근대에 가장 유명한 노예 무역 국가는 '''[[오만 제국]]'''으로, 탄자니아 앞바다의 [[잔지바르]] 섬에 본부를 두고 아라비아 해 서쪽의 제해권을 장악한 뒤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잡은 흑인들을 이슬람 세계에 노예로 팔아먹는 강대한 [[식민제국]]이었다. 심지어 모리타니나 수단 같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아랍 국가들은 20세기 초까지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다. 그런 오늘날 아랍 국가들에서는 걸프 국가들을 제외하면 [[미국]]이나 [[브라질]]이나 [[쿠바]] 등과 달리 흑인들을 보기가 어려운데, 왜냐하면 남성 노예들은 웬만하면 거세당했고, 여성 노예들은 출산하면 그 아이는 그 즉시 살해되어서 씨를 못 남겼기 때문이다.[* 다만 흑인들이 완전히 대가 끊어졌다 할 수 없는 것이 현대 [[이집트인]]들과 같은 경우, DNA 검사에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http://research-paper.co.kr/amp/view/304&ved=2ahUKEwjW4vLurd3bAhXEULwKHetBAyAQFjAMegQIBBAB&usg=AOvVaw1aX7xMEfUgO4Frymltwz_Y&cf=1|#]] 사실 이상할 것도 없는것이 누비아(수단), 에티오피아, 소말리아와도 거래가 활발했었고 이 때문에 흑인 상인들이 이집트에 드나드는 경우는 많았기 때문에 흑인과의 혼혈이 광범위하게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아바스 왕조]]의 중심지였던 [[이라크]]에는 다른 아랍 지역에 비해 [[아프리카계 아랍인]]들이 가장 많다.] 경우에 따라서 씨가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라서 인도, 파키스탄의 사이디처럼 흑인 노예의 후예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비율이 적다. 오스만 제국의 흑인 [[환관]]이 특히 유명했다. 여성 흑인 노예들은 대게 하렘에서 심부름꾼을 하거나 부유한 무슬림 가정에서 가사 노동에 동원되었다. 백인 여성 노예가 출산한 자녀를 살해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지만, 백인 남성 노예의 경우에도 노잡이나 군인 노예로 쓰는 경우가 아니면 대게 거세가 행해졌다. 참고로 무슬림이 [[거세]] 시술을 담당하는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 기술자에게 맡겨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예외가 없는것은 아니기는 했지만 중동권에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주류만 아닐뿐 어느정도 비율은 차지했기 때문에 굳이 기술없는 무슬림에게 맡길 이유가 없기는 했다. 19세기 이집트의 케디브 왕조가 수단을 정복하자 하르툼에 상당수의 콥트교도 거세 시술자들이 정착하여 노예 거세를 맡았는데, 후에 하르툼을 장악한 [[마흐디 운동|마흐디 신국]]에서도 이를 박해하였지만 거세 시술을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죽이지는 못했다. 후에 오만 제국에서 독립한 [[잔지바르|잔지바르 술탄국]]도 노예무역으로 유명했다. 이 국가는 탄자니아 앞바다 잔지바르 섬과 맞은편 육지의 [[다르에스살람]]을 근거지로 해서 아프리카 내륙으로 진출하며 흑인들을 잡아다가 아랍 상인들에게 팔았다. 세력 범위는 탄자니아나 케냐뿐만 아니라 열대우림에 덮인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지역까지 미쳐 중앙아프리카 내륙의 많은 술탄국들이 잔지바르의 지원을 받았다. 공급이 얼마나 많았는지 군마 한마리 가격이 노예 20~50명 시세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한다. 그리고 이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콩고 지역에 진출하는 명분이 되었다. 이 이후 잔지바르와 그 봉신국들은 레오폴드의 [[콩고 자유국]] 식민[* 다만 레오폴드 2세의 정책은 이들 아랍인들의 노예무역이 차라리 양반일 정도로 훨씬 더 악질적이었다. 그리고 편의상 식민지로 기술되긴 했으나 사실 콩고 자유국의 초창기 지위는 엄밀히는 식민지도 아니고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사유지에 훨씬 가까웠다. 나중에야 공식적으로 식민지가 된 것.] 정책의 최대 적수로서, 콩고 동부 지역 교역소들을 파괴하고 벨기에인들이 부리는 흑인들을 잡아갔을 뿐만 아니라 콩고 식민지의 주 산업이었던 [[상아]] 채취 산업에도 경쟁자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결국 1890년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던 영국과 독일 제국의 진출로 영향력이 위축되었고, 1894년에는 벨기에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1896년 [[영국-잔지바르 전쟁]]에서도 개전 38'''분'''만에 패배하며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형식상의 노예제는 폐지되었고, 술탄정 자체는 잔지바르가 독립한 직후인 1964년까지 이어졌지만 1964년 잔지바르 혁명으로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 인도인이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하면서 흑인 공화국이 성립되었고 그해 중순에 탕가니카와 통합하면서 [[탄자니아]]가 성립되었다. 근대 [[중앙아시아]]에서도 [[준가르 칸국]]에서 카자흐인과 키르기스인 포로들을 데려다 오아시스에 라티푼디움과 흡사한 시스템의 노예 농장을 경영한 이래 노예 무역이 부흥했다. 티베트 불교가 국교였던 [[준가르 칸국]]이 청제국 강희제의 침략으로 멸망한 이후에도 [[우즈베크]]족이 건국한 [[코칸트 칸국]]이 자국의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을 꾸준히 습격하여 이 지역의 한족 상인 대부분을 살해하거나 노예로 납치했으며, 이 와중에 이슬람을 믿는 [[회족]]들도 종종 한족으로 오인받아 납치당했다. 이렇게 사로 접힌 한족 노예들은 주로 농업 개간에 투입되었다.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제정 러시아의 남부 지역을 [[히바 칸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인 [[투르크멘]]인들이 약탈하기도 했다. 한 번은 러시아의 [[카자크]] 탐험대 전체가 실종된 적도 있는데 아마 전부 투르크멘의 공격으로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린 경우로 추정된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수천이 넘는 러시아인들이 노예로 잡혀 시장에서 거래되어 각지로 팔려나갔고, 이는 제정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토벌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의 '응징 전쟁'이 일어날까봐 매우 두려웠고, 실제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러시아인 노예 사냥에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토벌을 벌이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토벌 명분을 없애기 위해서 러시아가 사마르칸트 토벌에 실패한 이후에 [[부하라 칸국]]과 교섭하여 수천의 러시아인 노예들을 러시아로 송환시키는데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그러나 이러한 응징 전쟁으로도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러시아인들을 사냥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고, 1860 ~ 80년대에 제정 러시아가 카자흐스탄 전역, 투르크멘, 키르기즈, 우즈벡 전역을 차지한 뒤에야 중앙아시아 노예 무역은 소멸하기 시작한다. 이슬람권의 노예들은 [[꾸란]]에서 노예 해방을 선행으로 기록한 것도 있고 노예에 대한 인격적인 대우를 권하는 교리 덕분에 유럽 · 아메리카의 노예들보다는 훨씬 나은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었으나,[* 출처 : 대항해시대(주경철)] 기실 비인간적인 노예제에서 노동과 성을 착취받는 입장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흔히들 종교에서 "우리 교리는 ~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낫다!" 라고 주장하는 일이 많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교리에서만의 이야기고 실제로는 교리를 왜곡, 확대해석, 개악 등으로 해석하는 측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이용해먹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서 교리가 더 낫네 어쩌네는 결국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슬람 빼면 대부분 시대적 흐름에 맞추려고 하는 편이기에 충돌이 비교적 덜하지만('''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슬람은 그런 노력마저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방해를 받기 때문에 이슬람교 내에서도 충돌이 잦지만 이슬람교 외의 그 어떤 것들과의 충돌도 매우 잦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