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예 (문단 편집) ==== [[일본]] ==== 일본은 [[야요이 시대|야마토 시대]](3세기)부터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예제를 폐지할 때까지 공식적인 노예제도를 운영하고 있던 나라였다. [[일본]]의 노예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후한서]] 동이전으로[*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 왜국 왕 스이 쇼우(帥升)가 후한의 안제(安帝)에게 노예 160명을 바친 기록이 최초이다. 이외에도 왜왕 히미코가 239년 위(魏)의 [[조예|명제]]에게 사절을 보내 남녀 노예를 바첬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등 적어도 [[야요이 시대]]때 부터 노예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노예들은 당시에는 세이코(生口)라고 불리웠다. 결국 일본의 노예제도는 [[에도시대]] 이후 쇄국에 의해 자유교역이 제한된 것과 전쟁이 끝나고 인구가 늘어나 노동력 부족이 대부분 해소되어 매매가 상업적으로 성립되지 않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https://hajimete-sangokushi.com/2019/09/10/%e6%88%a6%e5%9b%bd%e9%97%87%e4%ba%ba%e8%ba%ab%e5%a3%b2%e8%b2%b7/|#]] 물론 [[에도시대]] 이후에는 그 대신에 [[농노]]제가 그만큼 크게 발달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https://blog.naver.com/marich77/40142688132|#]] [[다이카 개신]] 이후 일본은 중국의 [[율령제]]를 본떠 국민들을 [[양인]]과 [[천인]]으로 나누고 천인은 5가지로[* 陵戸、官戸、家人、官奴婢、私奴로 구분하였으며 입은 옷의 색으로 구분하였기에 五色の賤라고 한다.] 구분하였다. 8세기에는 노예를 누히(奴婢)라고 부르며 노예 제도에 관한 일련의 법률들이 발표되었다. [[10세기]] 초 율령제가 붕괴되면서 법적인 노예 계급은 사라졌으나 실질적인 노예제도는 여전하였고 노예매매와 인신매매 역시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때 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굶주리던 사람들이 자신과 배우자, 자녀를 판매하는 등 [[인신매매]]가 증가하면서 [ruby(人商人, ruby=ひとあきびと)]라 불리는 노예상인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1239년 인신매매 금지를 명하기도 하였으나 심한 기근이 발생했을 때에는 자매[* 自賣 - 스스로를 다른 사람더러 노예로 사 달라고 하는 것]를 묵인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후 [[센고쿠 시대|전국시대]]에 다시금 인간사냥과 노예매매가 빈번히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전국시대 전쟁이 터지면 [[아시가루]] 등 잡병들이 침략지의 농민들을 상대로 일명 란보도리(乱妨取り) 또는 란도리로 불리우는 인간사냥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노예사냥을 해왔기 때문이다. [[https://www.japanese-wiki-corpus.org/history/Ranbodori.html|#]] 노예사냥과 인신매매는 전쟁에 참여하는 아시가루들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며 이는 전국시대의 아시가루들은 부족한 급여의 대안으로서 적지에서의 약탈을 합법적으로 인정받아 자신들이 침략한 침략지의 주민들을 잡아서 노예로 팔아 먹는 것이 귀중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 당시는 [[대항해시대]]로 [[포르투갈]] 같은 유럽 세력들과도 교역을 하였기에 많은 일본인 노예들이 유럽 상인들에 의하여 전세계 각지로 팔려나가게 되었다. [[https://www.jstor.org/stable/25066328|#]]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Eo0gEsTEWdMJ:www.tufs.ac.jp/common/is/kyoumu/pg/pdf/244_romulo_youshi_e.pdf+&cd=6&hl=ko&ct=clnk&gl=kr|#]] [[https://www.amazon.com/Portuguese-Modern-Studies-Global-Slavery/dp/900436580X|#]] 이는 [[덴쇼 소년사절단]]이 해외에서 직접 목격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https://hajimete-sangokushi.com/2019/09/10/%e6%88%a6%e5%9b%bd%e9%97%87%e4%ba%ba%e8%ba%ab%e5%a3%b2%e8%b2%b7/|#]] 이렇게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농민들이나 전쟁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은 사례가 매우 많았다.[* 심지어 구매해가는 사람들도 똑같이 서양인들이었다.]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자국민 노예들을 팔아넘겼으며[* 대가로 [[조총]]과 [[화약]]등을 받기도 했다.], 포르투갈인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인 노예 무역이 기승을 부렸다. [[https://ja.wikipedia.org/wiki/%E3%83%9D%E3%83%AB%E3%83%88%E3%82%AC%E3%83%AB%E3%81%AE%E5%A5%B4%E9%9A%B7%E8%B2%BF%E6%98%93|#]] 여기에는 서양 선교사도 가담한 경우도 있어서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독교를 금압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https://ian3714.blog.me/220761544006|화약값 대신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 중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도 노예로 팔려갔다. 훗날 [[16세기]] 말에 에도 막부는 일본 내에서 노예 매매를 금지했으나, 천민계층인 [[부라쿠민]]이나 '[[요시와라 유곽]] 같은 집창촌에서 [[성노예|여성을 매매]]하는 등 실질적으로는 노예라고 규정지을만한 이들이 계속 잔존했다. 거기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노]]들이 노예처럼 의복 등에서 '노예상징'을 강요받는 등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https://blog.naver.com/marich77/40142694470|#]] 1570년에 포르투갈에서는 세바스티앙 1세가 포르투갈 내의 일본인 노예 거래를 금지하는 법령으로 세바스티앙법을 공표했지만, 포르투갈령 인도에서는 준수되지 않았고, 1603년에 스페인에서 펠리페 3세가 고아에서 일본인 노예 금지를 위해 세바스티앙법을 다시 공표했으며, 고아에서는 이를 반대했다. 1605년에 펠리페 3세가 인도 부왕에게 세바스티앙법을 공표하도록 했고, 1607년에 고아에서 일본인 노예를 삼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암암리에 이루어졌고 단속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의 사용인(소작인)이나 가내 노예는 지주를 섬기고 숭상한다. 어떤 귀족이라도 사용인에게 불순종한 면이 있으면 죽여 버리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용인들은 주인에게 복종하고 주인과 이야기할 때는 매우 추울 때에도 항상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고 있다. >[[https://ja.wikipedia.org/wiki/%E8%BE%B2%E5%A5%B4%E5%88%B6#%E6%97%A5%E6%9C%AC%E3%81%AB%E3%81%8A%E3%81%91%E3%82%8B%E8%BE%B2%E5%A5%B4%E5%88%B6|#]] 또한 11~17세기 일본에는 게닌(家人, 下人)이라는 피지배 예속민 계층이 존재했다. 이들의 정확한 규모에 대해선 여러 주장들이 있으나 17세기의 일부 지방들의 인구대장에서 이들의 비중이 3,40%였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주인에게 예속된 존재였으며 주인에 의해 매매, 양도, 상속, 임대가 가능했고 주인에게 소송할 권리가 없었다. 주인들은 자신의 게닌을 죽여도 일반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닌의 신분은 세습되었으며 주인이 서로 다른 게닌들이 결혼해 낳은 아이의 경우 종모법에 따라 여자 게닌의 주인의 게닌이 되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들이 노예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영훈 교수는 자신의 논문 '11~16세기 한국의 노비와 일본의 게닌(下人)'(2004)에서 이들이 노예 상징을 강요당했고 심한 차별을 당했던 점, 일본 막부에서 이들을 완전한 주인의 재산으로 인정하고 주인과 게닌 사이의 관계에 개입을 안했던 점, 그리고 조선의 노비는 주인을 제외한 다른 자유민들에 대한 법적인 권리는 보유했다는 점 등을 들어 일본의 게닌이 조선의 노비보다 더 노예적인 범주에 가까운 존재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노비제를 보는 시각과 유사하게 일본 내에서는 노예라고 통칭하진 않은 수많은 계급과 종속신분들을 서구 기준의 노예로 바라보는 서양인들도 즐비했다. 서양의 계약제 하인(연한계약하인)들과 유사한 연계봉공인들 또한 사실상 농노 혹은 노예로 보는 관점들도 있다. 연계봉공인들은 자신과 계약한 주인을 고소할 수 없었으며, 1698년 막부에서는 연계봉공인의 계약기간을 평생으로 잡고 노동을 세습시키는 것을 허용했다고 한다.[[https://ja.wikipedia.org/wiki/%E8%BE%B2%E5%A5%B4%E5%88%B6#cite_ref-fudai_28-0|#]] >'''"일본 정부는 인신매매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 루스 호가 쿨리들과 맺은 계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창녀의 인신매매는 무엇입니까? 그녀들은 어릴 때 돈으로 팔려서 가혹한 조건 아래 [[요시와라 유곽|홍등가]]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일본인 창녀의 매매가 합법이라면, 페루인 선장의 행위도 합법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까."''' >----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영국인 변호사 디킨스의 변론 >'''"설사 [[요시와라 유곽|창녀 매매에 의해 예증될 만한 노예제가 일본에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노예를 국외에 내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청나라인 노동자를 요코하마에서 국외로 이송하려 한 페루인 선장의 행위는 위법이다."''' >----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특명재판장 오오에 타쿠(大江卓)의 판결 이와 별개로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요시와라 유곽]]에서 일하던 일본의 [[유녀]]들도 사실상 [[성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일본측의 판결문에서도 이들이 사실상 노예임을 인정한것을 보면 일본내에서도 이들을 사실상의 노예라고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근대화 시절인 [[19세기]] [[메이지 유신]] 무렵부터 [[20세기]]인 1920년까지 일본에서는 [[가라유키상]]이라고 하여 규슈 지역의 가난한 여자들 30만명을 해외에 [[성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https://blog.naver.com/marich77/40202878241|링크1]], [[https://m.blog.naver.com/donmany0203/30170986586|링크2]], [[http://enjoyjap.egloos.com/1924854|링크3]],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2970|링크4]] 이 [[가라유키상]]에 대해 일본 사회는 매우 상반된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초창기에는 "귀중한 외화를 벌어다주는 애국자다!"라고 칭송하며 낭자군(娘子軍)이라고 불렀으며, 심지어 근대 일본에서 가장 추앙받았던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조차 "매춘부의 해외 수출은 적극 장려되어야 하며, 결코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긍정적으로 볼 정도였다. 그러다가 1905년 일본이 러시아와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국제 사회에서 국가의 위상이 올라가자, "더 이상 외국인들 보기에 부끄러운 가라유키상이 계속 있으면 나라의 체면이 깎인다."라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결국 1920년 가라유키상은 폐지되었다.[* 그러니까 일본인들도 가라유키상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외국에서 가라유키상으로 있다가 운 좋게 일본으로 돌아온 일본인 여성들은 주위 사람들한테 더러운 창녀라고 손가락질을 받다가 자살하는 일도 있었을 만큼, 평판이 안 좋았다.] 그런가 하면, 보기 드문 경우지만 조선에서 일본인 노예를 사들이는 일도 꾸준히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810021_003|왜인 노비를 사는 것을 금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210017_004|도망갈 것을 우려하여 왜노(倭奴)를 궁벽한 곳에 옮겨 두게 하다]] 심지어 고려시대에는 일본(日本) 상인 100여인이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고려(高麗)로 들어갔다가 고려에서 그 재화를 모두 빼앗고 원나라에 표문을 올려 일본인들을 전부 다 노비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 [[http://db.history.go.kr/id/cnkb_060_0800_0010|고려에서 표류한 일본상인을 노비로 삼기를 요청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