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섬브리아 (문단 편집) == 번영과 몰락 == 7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종교, 예술, 학문 등의 문화적인 부분에서 발전이 많았다. 그러나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점차 동부 해안에서 [[바이킹]]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노섬브리아 영토였던 린디스판 섬의 린디스판 수도원을 약탈한 것을 시작으로 노섬브리아를 유린하였다. 이후 바이킹쪽의 전설에 따르면[*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문서와 같이 보면 좋다.] 스웨덴과 덴마크의 전설적인 군주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는 제멋대로 구는 아들들의 행태에 분노하여 배 단 몇 척만 가지고 노섬브리아를 정복하겠다면서[* 당시 라그나르가 탔던 배는 '크나르'라는 배였는데, 보통 한 척에 100명, 우겨넣어서 많이 타 봐야 200명 정도였다. 즉 끽해봐야 1,000명도 안 되는 전사들과 함께 잘나가는 왕국 하나를 정복해보겠다고 한 것이다. 누가 보아도 만용이었지만, 바이킹의 전성기를 이끈 자신을 도외시하고 아들들이 제멋대로 구는 통에 환멸을 느낀 것이라고도 한다.] 9세기경 침략해왔고, 노섬브리아 왕 '''앨라 2세'''(Ælla II)[* 노섬브리아의 왕이었음은 확실하나 사료가 적어 어떤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현재 알려진 그의 모습 대부분은 바이킹쪽 전설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뿐이다.]는 해안가에서 대승을 거두어 그를 사로잡았다. 이후 앨라 2세는 라그나르를 독사가 득시글거리는 뱀굴에 던져넣어 죽여버렸다. 라그나르가 처참하게 죽자 바이킹들은 분노하여 라그나르의 여섯 아들, 즉 굳센 뵤른, 뱀눈 시구르드, 약골 이바르, 흰옷 할프단, 흐비트세르크, 우바[* 이중 흐비트세르크라는 이름은 본래 '흰옷'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할프단과 동일인물로 여기기도 한다.]가 군대를 이끌고 대대적으로 잉글랜드를 침략하니, 이것이 '''[[이교도 대군세]]'''의 시작이었다. 866년 수도 에오포르위치(요크)가 함락당했고, 앨라 2세는 붙잡혀 [[피의 독수리]]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노섬브리아의 남부 일대가 점령당했다. 이후 베반부르흐(뱀버러)를 수도로 한 [[앵글로색슨족]]의 노섬브리아[* '노스레오데'라고도 불린다.]와 요르비크(Jórvík, [[요크]])를 중심으로 한 [[바이킹]]의 노섬브리아로 분열되었다. 877년 바이킹 노섬브리아의 왕 '''할프단 라그나르손'''(Hálfdan Ragnarsson)이 [[더블린]]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면서 아일랜드를 침공했다가 전사했다. 그러자 북쪽의 앵글로색슨 노섬브리아의 왕 '''에즈베르흐트'''(Ecgberht, 에그버트) 2세는 남쪽으로 진군해 버니시아 지방까지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에그버트 2세 이후 앵글로색슨 노섬브리아는 내부 분열로 쇠락했다. 909년에 [[대 에드워드]]가 군사를 보내며 떠보자 910년에 하프단과 에오윌스가 보복으로 [[머시아]]와 [[웨식스]]로 군사를 보냈지만 오히려 참패해 앵글로색슨족의 통치를 받다가, 918년에 라그날 1세에 의해 바이킹의 통치로 탈환된다. 이후 즉위한 시흐트리크는 바로 체셔주를 공격했고, 이후 926년 결국 웨식스에 항복한다. 시흐트리크 사후 927년, 잉글랜드 왕국의 건국을 선포한 [[웨식스]]의 '''애델스탄'''([[애설스탠]])은 노섬브리아로 진군해 요르비크의 바이킹 노섬브리아를 합병했다. 애설스탠 사후 노섬브리아는 부활했지만 954년 잉글랜드의 왕 '''[[이드리드]]'''의 공격에 완전히 병합되고 말았다. 다만, 이 시기에도 문화적으로는 발전되었는데 특히 [[데인로]]로 인해 다시 도입된 [[북유럽 신화]]와 [[기독교]] 신앙이 합쳐진 예술 작품이 크게 유행했다. 노섬브리아를 계승한 현재의 지명으로 [[노섬벌랜드]]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