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비 (문단 편집) === [[남북국시대]]([[통일신라]]) === [[남북국 시대]] 중 [[통일신라]]에 대해서는 노비의 숫자가 이전에 비해 줄어드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주로 전쟁에 의해 발생하는 포로 노비가 급감하였기 때문이다. 통일 후 전쟁이 확실히 줄었으니까. 이와 관련된 기록으로 통일신라 촌락의 인구 구성을 보여주는 [[민정문서]]를 살펴보면, 4개 촌락의 구성원 442명 중 노비는 25구에 불과하였다고 나오기도 한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 민정문서를 근거로 통일신라와 고려 초의 노비 비율이 조선보다 낮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하였다. 어쨌건 남아있는 기록이 적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으나, 신라 시기의 노비의 비율을 전체 인구 구성의 1할 정도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는 것이다.[* 관련 문헌 : 『역사적 실체를 찾아서-양반』,미야지마 히로시 저, 노영구 옮김, 출판-(주)도서출판 강(1996.6.20) 96-97p] 다만 해당 문서는 어디까지나 [[신라 촌락 문서]]에 기반한 주장이며, <[[신당서]]>에서는 [[진골]] 귀족이 약 3,000여명의 노비를 거느렸다고 되어 있다.[* 단, 이 숫자는 정확히 3,000명이라기보다는, [[의자왕]] [[삼천궁녀]] 썰이 그렇듯 그냥 '많다'는 당시의 문학적 표현일 가능성도 크다.]촌락문서 쪽이 당대 신라인이 직접 남긴 1차 사료로서 좀 더 나중에 외국인의 시각으로 작성한 신당서보다 가치가 높지만, 신라 전국의 조사기록이 아니라 그 중 일부 지역의 사례일 뿐이라는 게 단점. 민정문서에 나온 [[청주시]] 주변 지역의 노비 비율이 통일신라 다른 지방의 상황과 같을지 다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