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부히토 (문단 편집) == 인물상 == [[파일:external/www.aigi-country.com/histry1-021.jpg]] ||[[기후현]]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기는 노부히토 친왕|| 노부히토 친왕은 [[스포츠]]광이었으며, 특히 [[스키]]를 즐겼고, [[경마/일본|경마]]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 자신도 [[승마]]를 즐겼다고 하며, [[일본]]의 유명한 경마 대회인 다카마쓰노미야배(高松宮杯)[* 현재의 [[타카마츠노미야 기념]]. 본래 [[나고야]]의 주쿄 경마장에서 열리던 1970년의 주쿄대상전에서 친왕이 직접 우승컵을 수여한 것을 계기로, 다음해인 1971년부터 대회명을 타카마츠노미야배로 변경 및 재시작한 것이 이 대회의 시초다. 1997년부터는 중상대회 최상위 등급인 G1대회로 승격되고 이듬해인 98년부터 대회명을 현재의 타카마츠노미야 기념으로 변경하면서 가을의 [[스프린터즈 스테이크스]]와 함께 단거리마의 최강을 가리는 춘추 스프린트 대회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에 그를 기념하여 그의 [[미야고]]가 붙었다. [[적십자]] 등 사회에도 공헌을 많이 하였으며, 특히 [[미국]]에서 본 모금, [[기부]] 문화에 매료되어 일본에 그것들을 들여와 전파하기도 하였다. 또 어머니 [[데이메이 황후]]를 이어 [[나병]]협회의 총재를 맡기도 하였다. 해군 장교로 근무할 때, [[황족]]이기 때문에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었으나, 그 자신은 타 [[군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하였고, 황족의 특권을 절대 남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해군 참모장이었던 아리마 가오루(有馬馨) [[제독]]이 노부히토 친왕을 위해 참모장실을 제공하고 고급 주류를 바쳤으나, 노부히토 친왕은 단호히 거절하고 절대 받지 않았다. 이에 아리마 제독은 노부히토 친왕의 강직함에 크게 감탄하여 더 충성을 바쳤다고 한다. 표현하고 싶은 생각은 직설적으로 말하는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졌으며, 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같이, 전쟁을 무리하게 진행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평화주의자였다. 비록 일본 해군 장교로 복무했지만, 군인과 군대에 대해 쓴 소리를 하는 것을 삼가지 않았다고 한다. [[1971년]]에 도쿄 [[이오섬|이오지마]](硫黄島)를 방문했는데, 그곳에는 전쟁이 휩쓸고 간 흔적이 있는 [[동굴]]이 있었다. 동굴 속에는 사람의 뼈 뿐 아니라 불발탄, 유황 가스 등으로 위험한 상태였는데, 노부히토 친왕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굴에 들어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다만, 전쟁에 반대하며 전쟁을 주도한 일본군 강경파들과 대립하고 형 쇼와 덴노가 그들을 내치도록 조언하던 것과는 별개로 [[일본 황실]] 내에서는 황족이라는 [[부심(은어)|부심]]이 강해서 그런지, 평민 출신의 조카며느리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태자비]]와 그 친정아버지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郎)를 평민이라는 이유로 무척 무시한 일화가 있다. 히데사부로는 닛신(日清) 제분[* [[아시아]]에서 제일 큰 제분회사라고 한다.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을 만든 기업인 닛신식품과 전혀 다른 회사다. 닛신제분은 1900년에 구 [[화족]]가문인 쇼다 테이이치로가 설립했고, 닛신식품은 1948년도 [[안도 모모후쿠]]라는 [[재일중국인]]이 세운 회사이다.]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대재벌이며 그의 처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이라서, 황족 및 [[화족]]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장녀 미치코를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시집보낸 후의 일이었다. 히데사부로는 노부히토 친왕을 만나자 깍듯하게 인사했지만, 이전까지 인사를 잘 받아주던 노부히토 친왕은 히데사부로의 인사를 싹 무시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평민과 인척 관계가 되어 불쾌하다는 시위. 또한 미치코 황태자비가 2번째 [[임신]]을 했다가 [[유산(의학)|유산]]되었을 때,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 [[키쿠코 비]]는 "황실의 후사" 운운하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마음이 누그러져, 나중에는 미치코 황태자비와 친하게 지내고 그녀의 아이들을 귀여워했다고 한다. 한편 그의 부인인 키쿠코 비는 [[일본 황실]]에 남자아이가 없고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무남독녀 [[모리야 아야코|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만 있던 시절, '''"여자의 [[천황]] 계승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발언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물론 키쿠코 비는 여성 천황[* 여성의 몸으로 천황직에 오르는 것.]을 찬성했지, 여계 천황[* 여성 천황의 자손들이 뒤를 이어 천황이 되는 것.]을 찬성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일본사에서 여제는 꽤 많았지만 황후가 천황이 됐던 게 아닌 이상 여계계승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쿠코 비가 사망하고 2년 후인 2006년에 [[후미히토]] 친왕이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 친왕을 낳으면서, 여성 천황이나 여계 천황 이야기는 주춤해졌다. 하지만 이후 후미히토 일가에서 다소의 문제가 생기면서 다시 여성 천황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종합해보면 일본 황실 인사 가운데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모범적인 상식인이자 평화주의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