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부히토 (문단 편집) == 군인의 길 == [[파일:external/ohmura-study.net/30503.jpg]]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 현재 [[중국]] [[길림성]] [[창춘시]](長春市).]에 위치한 신경역(新京驛)에서 마지막 [[청나라]] 황제이자 당시 [[만주국]]의 [[황제]]였던 [[아이신기오로 푸이]](溥儀)와 만나는 노부히토 친왕.[* 노부히토가 더 작지만, 그의 키는 168cm로 형인 쇼와 덴노(165cm)보다도 컸다. 푸이의 키는 174cm로 추정된다. 둘 다 그 당시로서는 장신이었다.]|| [[1934년]]에 해군대학교에 입학하고, [[1935년]]에는 [[소령]]으로 진급한다. [[1937년]]에 해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보직을 거치다가 [[1940년]]에는 [[중일전쟁]] 당시 종군기장(從軍記章)[* 어떤 전쟁에 참가하면 그를 표창하기 위해 부여하는 기장이다. 공적에 따라 차등부여했음.] 및 [[훈장(상훈)|훈장]]을 받았다. 또 같은 해에 일본 해군 [[전함]] 히에이의 포술장(砲術長)[* 노부히토 친왕이 해군대학교 재학 당시 포술을 공부했기 때문이다.]을 지내고, 동년 [[11월 15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한다. 포술장을 지낼 당시, 부하 [[장교]]들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 임무가 무엇인지 잘 알면, 위기는 닥치지 않는다' 라고 훈시했다고 한다. [[1941년]], 큰형 [[쇼와 덴노]]의 명에 따라 [[고쿄]]에서 가까운 요코스카(横須賀)의 [[일본 해군 항공대]]의 [[강사]]를 맡았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군령부(軍令部) 부원과 [[대본영]](大本営)[*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최고 통수 기관.] 해군 참모를 지냈다. 수하 장교로부터 군대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쇼와 덴노]]에게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조언했다.[* 전후의 인터뷰에서, 노부히토 친왕은 "전쟁의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했던 까닭은, [[천황]]의 친동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1942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당시에 그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東久邇宮 稔彦王), 동생 [[다카히토|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三笠宮 崇仁親王)와 같이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한 몇 안 되는 황족 중 하나였다. 측근들과 함께 당시 일본의 패전이 거의 확실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진행하던 장본인이자 [[태평양 전쟁]]의 원흉인 [[도조 히데키]] 당시 [[일본 총리]]를 암살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쟁의 원흉인 도조 히데키를 암살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후에는 도조의 최측근을 비롯한 주전파 대다수를 제거하고 군부 정권을 무너뜨려 전쟁을 멈추는 대규모 쿠데타까지 계획 중이었다고 한다. 무조건 항복 후 [[미군]]이 [[일본]]에 들어왔을 때, 그는 당시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일본 총리]]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부탁을 받아, 끝까지 미국에 대해 항전을 주장하는 한 해군 항공대에 찾아가서 마음을 누그러뜨리도록 설득하기도 하였다. 특히 설득 내용이 대박인데, 그 항공대 대장이 "부하들을 [[카미카제]]로 보내야 한다"고 헛소리를 하자 '''"그럼 저 부하들을 [[이와모토 테츠조]]처럼 훈련시키고 카미카제를 시키는 건 어떤가?"'''라고 하자 말문을 닫아버렸다. 참고로 이와모토 테츠조는 [[일본군]]의 '''베스트 파일럿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