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무현 (문단 편집) === [[김대중]] === [[파일:노무현_김대중.jpg]] [[민주당계 정당]]의 쌍벽 중 하나였지만 그들의 하위세력들은 서로 계파갈등을 당 내부에서 일으키다 훗날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사태를 거쳐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으로 갈라지게 된다. DJ와 노무현의 만남은 YS가 노무현을 만났을 때 즈음이었는데, 5공 청문회에서의 강직하고 논리적으로 전두환과 재벌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보고는 노무현을 우연히 국회 본청의 의원 식당에서 만난 DJ가 악수를 청하면서 건넨 말이 "잘했어요. 잘했어요."였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접점이 없던 노무현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것이었다. 1990년에 일어난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을 창당해 나왔던 노무현은 YS를 비판하며 뛰쳐나와 DJ 밑으로 후에 들어가긴 하나, 호남 기반의 세력들이 차지한 새천년민주당에서도 비주류였고, 정말로 김영삼이 하나회를 축출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키면서 호랑이굴에서 호랑이를 잡겠다는 김영삼의 약속이 이루어지자, 당시에 YS를 비판했던 노무현은 입장이 난처해지며 YS와 DJ 세력 양쪽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찬밥 신세를 겪게된다. 이 시기에 김대중은 2000년에 노무현에게 [[해양수산부장관]] 직을 맡겨서 국무위원으로서 행정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떠오른 것도, 김대중 정권이 본인+세 아들들의 비리 및 국정원을 이용한 도청 등의 스캔들로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며, 동교동계가 호남을 제외하고 지지율을 잃을 때,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정권 유지를 할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카드로 판별났었기 때문이었다. 경남 기반 YS 밑에 있었기에 호남 기반 DJ세력에게서 외면받으며 찬밥 자리였던 영남의 민주당 후보로 끊임없이 도전하다 바보 타이틀을 얻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2003년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 이후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자, 노무현은 한나라당이 주도한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수용한다. 이에 동교동계의 반발이 거셌고, 대선 때 90%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호남권의 민심도 부정적이었다. 다만 그 해 4월 22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 김대중의 부부 동반 오찬 회동이 있었고 이때 서로의 생각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직접적으로 반목할 지경까지는 아니었고, 이후 특검 연장을 노무현이 거부하면서 큰 갈등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를 계기로 동교동계와 친노 세력간에 분열의 씨앗이 생겼고, 훗날 [[천정배]]가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광주 서구 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호남권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동교동계 인사들이 "친노와 화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친노]] 성향 의원과 [[한나라당]]의 옛 민주당계 의원 5명 등을 주축으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는데,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 [[새천년민주당]]까지 가세하자 김대중은 '''"탄핵 사태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라는 발언을 했고 이후 [[니혼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 정치가 변화할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는 발언을 하면서 사실상 열린우리당과 노무현의 편을 들었으며 노무현이 탄핵 기각으로 복귀하자 환영한다는 발언을 했다. 2009년 5월 23일 김대중은 독일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중이었는데, 그 날 새벽 노무현이 자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장례식 때 자신이 직접 쓴 추도사를 낭독하려 했지만 정부의 사실상 거부로 대신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책의 추천사로 갈음했다. 뿐만 아니라 몸이 쇠약해졌는데도 휠체어를 타면서까지 분향소에 조문을 가고, 영결식 당일에는 비서의 부축까지 받아가며 끝끝내 헌화까지 스스로 한 뒤 권양숙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들과 악수하며 오열하는 모습도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가깝고도 먼 사이었지만, 사적으로는 노무현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여담으로 이때부터 김대중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노무현이 사망한지 3개월만에 김대중도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