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동당(영국) (문단 편집) === [[영국병]] === 노동당의 반전은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영국병]]의 징조가 드러나던 [[1963년 영국 노동당 지도부 선거]]를 통해 [[해럴드 윌슨]]이 대표로 취임, 기존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수정자본주의로 개편하고, 경영 혁신과 과학 혁명을 내걸고 제조업 투자를 늘려 [[GDP]]를 올리려 하였다. 이를 통해 1964년 집권에 성공하나 [[파운드]]화 가치가 하락, 울며 겨자먹기로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진하였다. 경제난을 타계할 방법으로 1963년에 이어 1967년 두번째로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을 신청하지만 프랑스의 [[샤를 드골]]의 반대로 무산된다. 또한 1966년 선원 파업에 강경하게 대응, 노동당의 특기인 '당이 안 주도한 파업 때려잡기'를 다시 한 번 선보인다. 또한 보수당의 압박으로 이민 허가에 제동을 걸면서 정작 영국계 백인은 입국을 자유화하는 인종차별적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짐바브웨]]의 인종차별 정책에 [[솜방망이]] 제재를 가하고 [[남아공]]에 무기를 공급하는 등 외교에서도 비양심적인 모습을 보였다. [[몬티 파이선]]이 [[죽은 앵무새]]로 풍자했던 것 역시 이 시기의 윌슨 정부이다(…).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전쟁 참전 요청도 윌슨에게는 위기로 작용했다. 노동당 내 강경 좌파들은 미국을 맹비난하면서 반미 정책을 선동하였고 친미와 베트남 전 불참 사이에서 어렵게 줄타기를 하던 윌슨을 대단히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윌슨은 저 인간들이 미국에 해대는 것 반만큼이라도 중국과 월맹에 해대는 꼴을 본 적이 없다고 분노를 터트릴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분에 있어 전 총리인 흄을 비롯하여 보수당의 일각에서 윌슨을 도와서 결국 영국의 월남전 참전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실패와 고난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 사형제의 사실상 폐지, 동성애 비범죄화, 극장 검열 폐지, 임신 중절 자유화, 선거권 연령 21세 하향 조정 등 여러 사회적 개혁 법안들이 의회를 통과했다. 윌슨은 이 법안들을 자유 투표에 부쳤지만 진보적 성향이 강한 노동당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한 의석 구성 상 부결이 될리 만무했다. 그 외에도 보수당 정권 시기 축소되었던 사회 복지를 위한 지출을 다시 대거 늘리고 군사비 지출을 대거 삭감했다. 그 외 경제 활성화를 위해 기술부와 경제부를 신설하고 연 3.8% 성장률을 목표로 한 국가 발전 계획을 새로 수립하여 69년을 즈음하여 국제수지가 다시 흑자로 돌아서며 재정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다. 또한 문화산업 발전에 공을 들였는데 상징적으로 [[비틀즈]]에게 1965년 영국 왕실 훈장을 수여하도록 추천한게 바로 윌슨 총리였다.[[https://m.blog.naver.com/39queen/10046562394|관련된 내용의 블로그 글]] 또한 교육 예산을 크게 확장해 종합 대학을 44개까지 늘리고 오픈유니버시티 제도[* 한국으로 치면 방통대, 사이버대학 등과 유사하다.]를 도입해 국민들의 교육 접근성을 확대했다. 실제로 이 시기 정부 교육 예산이 처음으로 국방 예산을 추월하기도 했다.[[https://news.joins.com/article/11748530|비틀스에 훈장 … 현대식 정치 도입한 ‘민중의 남자’]] 이렇게 다사다난했던 6년이 지난 후 열린 1970년 총선을 앞두고 진행된 6월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을 상대로 7%p나 리드하는 등 노동당의 총선 3연승이 확실해 보였으나 정작 7월 본선에서 [[에드워드 히스]]가 이끄는 보수당에 다시 과반을 내주면서 실각하고 말았다. 당시에도 [[http://news.bbc.co.uk/hi/english/static/vote2001/in_depth/election_battles/1970_over.stm|엄청난 이변으로 묘사]]되었으며, 미국 [[리처드 닉슨]]의 1968년 대선 승리, 프랑스 [[조르주 퐁피두]]의 1969년 대선 승리와 더불어 [[침묵하는 다수]] 이론이 정치계에 확산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에게 정권을 내주고 노동당은 [[절치부심]]하였다. 보수당은 [[노조]]의 등록과 노사 조정기간을 의무화하는 등 노조의 통제에 나섰고, 이로 인해 [[파업]]이 급증하면서 보수당의 지지율이 추락하자 노동당은 여기에 급진적 정책으로 동조했다. 당시 [[토니 벤]][* 2014년 사망 전까지 노동당 좌파의 좌장이었다. 특이하게도 귀족 출신인데, 1960년 아버지의 스탄스게이트 [[자작(작위)|자작]]위를 물려받아 하원 의석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Peerage Act of 1963을 통과시켜 그때까지는 불허되던 작위 포기를 합법화시켰고, 본인이 법안의 1호 수혜자가 되어 돌아온 경력이 있다. [[제레미 코빈]]이 바로 이 사람의 직계 제자다. ~~정작 아들 [[힐러리 벤]]은 골수 [[블레어주의]]자라서 코빈이랑 앙숙인게 함정이지만~~]을 중심으로 한 당내 좌파는 금융, 건설, 운수, 조선 등의 산업의 국유화, 핵무기 폐기 등을 내걸었고, 1973년에는 이를 종합한 대안경제전략(Alternative Economic Strategy, 약칭 AES)를 내놓았다. 이를 통해 노동당은 1974년 두 번의 선거를 통해 집권에 성공, 2차 윌슨 내각을 수립한다. 노동당은 집권 후 대안경제전략을 실행에 옮겼으나, 그것은 위기에 몰린 [[브리티시 레일랜드]]나 [[영국항공]] 정도에 그쳤다. 또한 대안경제전략은 국민기업위원회가 주도하는 계획 협약에 따른 계획 경제를 추구했으나, 다국적기업과 대기업의 규제망 피하기 앞에선 속수 무책이었다. 게다가, 신성장동력 투자와 기존 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경시한 결과, 결국 1976년 한계에 달한 영국병이 폭발하면서 [[IMF]]에 금융지원을 받고 대안경제전략을 철폐, 복지 예산마저 삭감하며 노동당의 이상적인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이에 따른 파장으로 1978~79년 파업으로 '[[불만의 겨울]]'이 도래, '''노동당의 암흑기가 시작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