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덕술 (문단 편집) == 여담 == * 또 다른 일제 고문 형사였던 [[하판락]][* 그 역시 노덕술과 같은 행보를 걸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악행,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 습격으로 탈주, 이후에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사후에는 두고두고 악질 친일파로 손가락질을 당하게 되었다. 그나마 마지막에는 밀수에 가담한 것이 들통나 군에서 쫓겨나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는 불법 흥신소를 운영하며 검사를 미행하다가 구속되며 생전에 어느 정도 죗값을 치른 노덕술과는 달리 하판락은 무려 '''1990년대 후반까지도(!)''' 만행이 공론화되지 않은 채 잘 먹고 잘 살았다.]과도 친한 사이였다. 하판락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와 인터뷰에서 노덕술은 [[개소리|재주가 있어]] 일본 노래를 잘한다고 말하였고 술좌석을 잘 어울린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특히 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노덕술과 하판락은 해방 이후에도 인맥이 있었는데 서대문에 같이 있다가 반민특위에 체포된 후에도 마포 형무소에서 같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 붓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이것도 명필로 유명했던 이완용과 유사한 셈. [[https://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5134|#]] *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뺨을 때렸다는 설이 있으나 노덕술이 김원봉을 고문하였다는 이야기는 수십 년이 지나 [[1987년]] 월간경향에 수록된 기사 말고는 확실한 증거나 증인이 없다. 김원봉 역시도 이후의 대화나 증언에서 '굴욕'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는데 고문을 받았다거나 뺨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노덕술이 김원봉을 체포한 것 자체는 당대 기록으로도 남아 있는 사실이며, 체포 이후 그에게 큰 능욕을 주었다는 사실은 맞는 듯하다. 또한 중요한 점은 악명 높은 친일경찰인 노덕술이 당시엔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김원봉이 아닌, 무장항일독립운동의 1인자였던 김원봉에게 굴욕을 주었다는 그 상황 자체였다. * [[강우규]] 의사를 체포했던 '고문왕' [[김태석]]의 후예가 '''바로 이 사람이다'''. 이후 노덕술의 잔혹한 고문기술은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까지 이어진다. * [[전두환 정부|전두환 대통령이 오랫동안 떵떵거리던 시절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를 진두지휘했던 [[박처원]] [[치안감]](내무부 치안본부의 대공수사단장)과 매우 깊은 인연이 있었다.[* 참고로 이쪽도 '''21세기에 사망한 사람인데도 몰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실제로 박처원은 1947년 종로경찰서 사찰계로서 경찰에 입문했는데, 당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노덕술이였다는 것을 보면 정황상 노덕술을 상관으로 모시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 비슷한 경우로 [[김창룡(군인)|김창룡]]이 있다. 노덕술이 공산게릴라의 공격에 대처할 치안전문가가 필요하여 [[이승만]]이 빼준 인물이었다면 김창룡은 군내 좌익 숙청을 목적으로 고른 인물이었으니 맡은 임무도 비슷하고 둘이 초래한 부작용, 생전에 어느 정도 만행의 대가를 제대로 치른 것도 비슷했다.[* 다만 노덕술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 자택에서 병사했고, 이승만의 총애만 믿고 사방에 적을 만들었던 김창룡은 1956년에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 고향에 살고 있는 노덕술의 친척들은 노덕술의 실체를 전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노덕술의 친척들은 노덕술을 '장생포가 낳은 큰 인물'로 여기며 해방 후에는 위세가 [[부통령]]급이었던 데다가 '수사를 너무 잘해 가지고 자꾸 계급이 올라갔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이들 중 한 명은 "할아버지 이후 장생포에 사는 노씨 집안에서는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아 걱정이다"라고 말했고, 노덕술의 생가는 한동안 ''큰 인물'이 난 터'로 알려졌다고 한다. [[https://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5134|#]] * 노덕술의 생가는 지금도 남아 있다. 2010년대 중반까지는 노덕술의 친척뻘 후손이 살다가 오늘날에는 회사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CiVrGTfEPI0|#]] * 2014년 울산의 인물 후보로 선정되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2&aid=0000454135|논란이 일었다.]] 선정 기준은, 울산 출신이며,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공헌한 사람으로서 활동 여부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이 후보로 선정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후에 당연히 취소되었다. 저 울산의 인물은 어이없는 것이 노덕술을 빼면서 노덕술 고문의 대표적 피해자인 울산 출신 독립투사 [[이관술]]도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같이 빼버렸다.[* 이관술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관술은 오직 [[대한민국]] 땅에서 끝까지 살다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것은 물론이고 [[북한]] 정권 수립에도 기여한 것이 '''전혀''' 없다.] * [[을사오적]], [[송병준]]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악명이 높은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였다 보니 사후에도 온갖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 [[노태우]] 시기 [[국무총리]]였던 [[노재봉]]의 아버지가 노덕술이다 -> 노재봉의 아버지는 라전모방 창업주였던 노준용이었다. 그리고 노덕술은 정황상 평생 [[독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노덕술은 죽은 뒤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노덕술의 무덤 위치는 확인할 수가 없다. 애초에 노덕술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면 [[민족문제연구소]], 애국국민운동대연합 등등의 시민단체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당장 노덕술이 [[6.25 전쟁]] 시기에 훈장 3개를 수여받은 것이 밝혀진 것만 해도 전국민적으로 공분이 들끓었는데, 현충원에 묻혀 있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훈장 수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공분이 들끓었을 것이다.] * 노덕술이 마지막까지 살던 집터에 [[10.26 사건]]이 일어난 궁정동 [[안가]][* 오늘날의 무궁화동산 자리에 있었다.]가 지어졌다. -> 노덕술의 집은 정확히는 오늘날의 무궁화동산 자리 맞은편에 있었다. * 한편 노덕술의 마지막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함정호는 1972년에 검사직을 그만둔 후 변호사로 일하다가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