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덕술 (문단 편집) === [[8.15 광복|해방]] 이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해방직후 노덕술.jpg|width=100%]]}}}|| 해방 이후 잠시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던 중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이것이 노덕술의 반공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말에 월남하였고 다음 해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하였다. 1946년 5월 미군정 조작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강점기 이래 가장 악연이 깊던 독립운동가 이관술을 지목해 누명을 씌우는 데 가담하였다. 7월 [[이관술]]이 체포되자 노덕술은 일제강점기 수차례 고문했던 그를 또다시 고문했다. >(정판사 사건 때)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일제때 고문왕으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었다. 장택상의 진의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노덕술이 필사적으로 이관술을 체포했다. 얼굴은 권오직이 더 노출되어 있었는데도 권오직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관술과 노덕술과의 만남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이관술과 노덕술은 다 같은 울산 사람이었다. 노는 해방되면서 일제고등계 경찰에서 미군정 경찰로 옮겼고 도리어 영전됐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관술이 살아있으면 자기의 전죄가 언젠가는 폭로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중략) >그([[이관술]])는 조국독립 이외에는 세속지사에는 아무 흥미가 없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나서 독립운동한다고 몇번 경찰에 잡혀 죽을 고문만 당하고 6ㆍ25때 교도소 안에서 죽은 사람이다. >----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https://www.joongang.co.kr/article/2426766|#]], [[http://naver.me/xOvZtdHI|##]] [[장택상]]과 더불어 [[여운형]] 암살 배후로 거론되기도 한다.[* 직접 암살한 것은 아니지만, [[여운형]]이 지속적으로 테러를 당할 때 경찰임에도 테러범을 봐주고 고의적으로 방관함으로써 암살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노덕술은 암살범들하고 비밀리에 서로 짜고 '단독범행'으로 축소하는 데 커다란 일조를 했다.] 1946년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 등 일당들을 검거함으로써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았고, [[이승만]]에게서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러는 와중에 독립운동가 중 최고 거물 중 한명이었던 [[김원봉]]을 체포, [[김원봉]]에게 모욕적인 처우로 치욕을 주어 그가 [[월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49년 1월 26일 공범 [[백민태]]의 자수로 그가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중부서장 박경림이 함께 하였다. 검찰의 기소문에서 밝혀지길 이 계획의 재정분야는 [[박흥식]], 언론분야는 [[이종형]]이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는 백민태에게 [[노일환]], [[김웅진(1906)|김웅진]], [[김장열]], [[이문원]] 등을 납치하여 '''"우리는 이남에서 살 수 없으니 북으로 가겠다."'''라는 가짜 유서를 강제로 받도록 하고 이후 암살하면 뒤처리[* 여기서 이 뒤처리의 의미는 '''"[[삼팔선|38선]]에서 월북하려는 반민특위 위원들을 저지하자 저항하여 사살하였다"'''라는 수사발표를 한다는 뜻이었다.]는 경찰이 알아서 하겠다는 지령을 내렸었다. 하지만 이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노덕술.png|width=100%]]}}}|| || 공판에 출석하는 노덕술 || 노덕술은 지명수배 상태에서도 번호판을 단 경찰 지프에 경호원까지 대동하여 다녔고 내무부장관 [[윤치영]]이나 외무부장관 [[장택상]] 등의 집을 방문하여 "내가 잡힐 줄 아느냐"며 큰소리도 쳤다고 한다. 결국 동화백화점 사장 이두철의 집에서 검거되었는데 권총 6자루와 다량의 실탄, 현금도 34만 1천 4백 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62200329205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6-22&officeId=00032&pageNo=5&printNo=9763&publishType=00020|경향신문]]. 반민특위 조사기록에 따르면 1949년 노덕술의 재산은 60~70만 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80킬로그램 쌀 8만 가마를 살 수 있고, 현재 시세로 하자면 1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모은 셈이다.[* 출처 악인열전 p.137] 상술했듯 순사부장 시절부터 부패한 면모를 보여줬단 것을 감안하면 부정축재로 모은 재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승만노덕술2.pn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노덕술과이승만.jpg|width=100%]]}}}|| ||<-2><#000> '''노덕술에 관한 이승만의 국무회의록''' || >'''노덕술 피검에 관하여는 그가 치안기술자임을 비추어 정부가 보증하여서라도 보석하도록 함이 요망''' >----- >'''불법조사관 2명 및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여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 >----- >'''[[이승만]] 대통령'''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이 체포되자 노덕술은 그저 치안기술자일 뿐이라며 [[김상덕(1892)|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직접 만나 그의 석방을 종용했고[[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81400289122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8-14&officeId=00028&pageNo=22&printNo=2312&publishType=00010|##]] 공보처장 명의로 '정부인사의 조사를 중지한다'고 공포하고 특위법의 개정까지도 시도하는 등 특위 활동을 방해하였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02500329115001&editNo=20&printCount=1&publishDate=1994-10-25&officeId=00032&pageNo=15&printNo=15236&publishType=00010|##]]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2180032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2-18&officeId=00032&pageNo=1&printNo=736&publishType=00020|이에 대한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과 부위원장 김상돈의 당시 국회 증언]]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노덕술33.jpg|width=100%]]}}}|| || 헌병 복무 당시의 노덕술. 안경을 끼고 좌측에 두번째로 서 있는 사람이 노덕술이다. 여담으로 우측에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최난수]]라는 인물로 노덕술과 똑같은 친일 경찰 출신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려 했던 자다. || 노덕술은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어 바로 [[경기도청]] 경찰국의 주임으로 영전했고, 이후 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군사경찰|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였으며[* [[이근안]]은 군인에서 경찰로 변신했다.] 1950년에는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 1954년 부산 제2육군 범죄수사단장, 1955년 서울 15육군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내는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주로 대공수사 업무를 담당했다. 참고로 [[9.28 서울 수복]] 후에는 서울에 있던 인민군 부역자 처리 과정에도 참여했다고 한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293126|#]] 그의 일화 가운데 [[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1/05/021075000200105220360052.html|유명한 것]]은 '[[저놈 잡아라!]]'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종철 사건|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의 롤모델 격이며, 1948년 초에 벌어진 [[http://db.history.go.kr/url.jsp?ID=dh_006_1948_01_24_0090|장택상 피습]] 사건의 용의자 임화 박성근을 고문하던 중, 박성근이 수사관의 폭행으로 인해 사망하자 시체를 몰래 얼어붙은 [[한강]]에 구멍을 내고 유기한 후 노덕술이 취조실 창문을 열고 "저놈 잡아라!" 라고 외치며 박성근이 도망간 것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저놈 잡아라!]] 문서를 참조. 2016년 7월, [[뉴스타파]]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노덕술은 놀랍게도 이 시기 '''[[대한민국 훈장|화랑무공훈장]] 2개와 [[대한민국 훈장|충무무공훈장]] 1개를 받았다고 한다'''.[* 전자는 1950년과 1951년에, 후자는 1953년에 받았다고 하나 국가보훈처, 국가기록원에도 노덕술이 한국전쟁 당시 진짜 [[북한군]]과 맞서 싸운 공로를 입증할 자료는 없다고 한다.[[https://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452006_28802.html|#]]] 일제강점기 때에도 그 악행을 인정받아 1943년 일제로부터 훈8등 서보장(일제의 훈장)을 받았던 인물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처벌은커녕 훈장을 받았으니... 이처럼 악랄한 일제 경찰 출신이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경우는 모두 17명이다. 이후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잠깐 군에서 예편한 것으로 보이나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면서 다시 군으로 복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