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국대장공주 (문단 편집) === 사후 === > (노국)공주가 죽은 지 '''8년 뒤''' 어느 날. > '''[[명덕태후]]''': "어찌하여 비빈들을 가까이하지 않습니까?" > '''[[공민왕]]''': (눈물을 흘리며) '''"공주만 한 자가 없습니다."'''. > '''[[명덕태후]]''':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왕 또한 결국은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하여 심히 슬퍼하십니까.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삼가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 >ㅡ 《[[고려사절요]]》권29, [[1373년]](공민왕 22년) [[3월]] [[http://db.history.go.kr/id/kj_029r_0010_0040_0030_0040|#]] 노국대장공주를 지극히 사랑했던 공민왕은 '''공주 사후에도 그녀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식사를 차렸으며, 공주가 살아 있을 적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지고(至高)의 사랑.''' 노국대장공주의 요절로 인해 크게 상심한 공민왕은 그날 이후 정치에 뜻을 잃었고[* 사실 이 부분도 좀 애매한 게 이후에도 [[원나라]]가 축출되고 [[명나라]]가 들어서자 재빠르게 칭신을 하여 [[홍무제|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호감을 사는가 하면 요동 지역의 힘의 공백을 틈타 군대를 보내 요동성을 차지하기도 했고, 신돈을 전면에 내세워 꾸준히 권문세족 세력들과 힘싸움을 벌이면서 개혁을 단행하는 등 완전히 정사를 놓진 않았다. 다만 노국공주 사후부터 지나치게 극단적인 도박성 숙청이나 배신, 의심병 등을 보이는 것을 보면 심리적으로는 확실히 굉장히 벼랑끝에 몰리게 된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고려 왕조의 운명도 그날부로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당시 공민왕의 연령은 고작 36세였다. 이러한 노국대장공주의 요절은, 아이러니하게도 여러가지의 개혁을 시도하려던 공민왕에게 결정적인 좌절을 안겨주면서 [[고려]]의 몰락이 가속화되는 계기로 뜻하지 않게 작용하게 된다. 다만 이것이 단순히 공민왕의 순애보가 지나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적인 면에서 [[권문세족]]들의 반발을 누르고 있었던 노국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이 시도한 개혁정책의 동력이 크게 약화됨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녀의 요절은 다른 왕실 여인들의 죽음과 다르게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로 정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역사 교과서에까지 서술된 얼마 안 되는 역사속의 로맨스라 할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공민왕의 애처가 기질은 한 나라의 군주로서는 좋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바로 후계 문제가 터져서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이다.[* 외국의 사례로 인도 무굴 제국의 파디샤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둘의 로맨스는 [[타지마할]]이라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겼지만 이로 인해 [[무굴 제국]]은 점차 쇠퇴기를 맞게 된다.] 실제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로맨스는 고려의 멸망을 앞당기는 촉진제가 됐다.[* 실제로 [[신라]] 말에 들어와 그나마 제대로 임금 노릇을 했다는 평을 받는 제42대 [[흥덕왕]]도 엄청난 애처가였고, 왕비 장화부인이 졸하자 그 이후부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후계자를 두지 못했고, 몇 십년만에 진골 귀족들 사이의 피 튀기는 왕위 다툼이 벌어지고 만다.] 국왕이 애처가일 때 아내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이후 늘 피가 튀기는 배틀로얄이 벌어진다.[* 이 때문에 바로 후대 왕인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핏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낳게 되는데 한 몫 한다. 물론 이 설은 조선 건국 당시 태조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의 주장이지만.] 공주가 죽자 왕은 매우 비통해하며 4도감과 13색(色)을 설치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고, 각 관사에 명하여 전(奠)을 차리게 하여 풍성하고 정렬하게 차리는 자에게는 상을 주었기에 돈을 빌려다가 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불사를 크게 일으켰고 장례에는 제도를 그리게 하여 왕은 그것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상사를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의 예에 의했기 때문에 사치를 지나치게 하여 국고가 텅 비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슬픔을 이기지 못한 왕은 공주의 그림을 그려 밤낮으로 마주보며 밥을 먹으면서도 슬피 울고, 3년 동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다고 전한다. 장례는 [[제국대장공주]]의 예에 따라 진행되어 4월 임자일에 '정릉'에 장례지냈다. 또 왕은 자신이 죽으면 공주의 곁에 묻히고자 했다. 정릉을 유지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원찰의 지정과 중창이 문제가 되었다. 정릉 옆 운암사를 원찰로 삼았는데, 본래 운암사는 교종이었지만 공민왕은 선종이었기 때문에 원찰로 삼으며 이름을 '광암사'로 바꿨다. 이때문에 광암사는 전국 10대 사찰에서 서열 2위에 이르게 되었다. 얼마 뒤 일대를 '광암동'으로 바꾸고, 편액을 내걸기를 '광통보제선사'라고 했다. 광통보제선사를 원찰로 삼으면서 정릉 보호와 관리를 위해 원찰에 부속시킨 토지 및 세금 등 제반 재산들의 침탈과 도용을 막기 위해 신하들과 함께 맹세를 하고, 그것을 <사책>에 기록하여 명산에 보관하게 했다. 또한 원찰을 지정된 광통보제선사를 1372년부터 대규모로 중창하게 하고, 이를 위한 비석은 공민왕이 직접 나서 원나라에서 구했으며 대공사는 공민왕 시해 이후에도 지속되어 1377년(우왕 5년)에 완성되었다. 완공된 광통보제선사는 미륵전, 관음전, 종루를 포함하여 100여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대규모였다. 하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영전 공사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의 기록이 남아 있고 그것들은 모두 비판적인 것들이었다. 영전 조성 공사는 한 번 이전하고, 여러 번 부속 건물들을 재공사했다. 1366년 5월 정릉 조성 공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위치는 왕륜사 동남쪽이었다. 이때 모든 관원들로 하여금 등급에 따라 역부를 내어 나무와 돌을 운반하게 하였다. 사용한 부재들에 너무나도 신경을 써서 나무 하나를 수백이 끌어도 앞으로 나가지 않기도 했고, 죽은 소들이 길에 연이어 넘어져 있었다. 이 일에 국력이 얼마나 집중되었는지, [[왜구]]가 교동에 쳐들어와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는데도 어떻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1368년 5월 영전의 불우가 협소하여 [[승려]] 3,000명을 수용할 수가 없다고 해 새 터를 찾아본 뒤 왕륜사 영전은 그만두고, 송악 동쪽에 있는 마암의 서쪽에 영전을 새로 조성하게 하였다. 다만 왕륜사 영전을 다시 조성했다는 것으로 보아 철거한 것 같지는 않다. 그 위치는 [[성균관]] 앞의 냇물 건너편 곧바로 지척이었는데, 신진사대부가 성균관 중영을 계기로 그곳에서 모임을 하게 된 것이 정치 세력으로 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서 영전 상황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암 영전의 조성에는 기초 공사를 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1368년 6월 방리의 장정과 42도부를 총동원하여 정치 작업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전각을 세우는 데 기초가 되는 초석이 다음해(1369) 9월에야 갖고 왔다는 것으로 보아 터 닦기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영전의 초석을 마암까지 끌어 오는데 크기가 집채 같아서 '진동하고 울리는 소리가 소울음과 같았다'하고 목재를 충당하기 위해 주•현에서 정부를 징발하여 수로로 운반하는데 압사하고 익사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또한 동원된 백성들의 수는 장정 5,000명이 넘었다. 이때는 원나라에서 인정받은 목수들도 동원했다. 원 혜종이 탐라에 자신이 피난하여 살 궁궐을 조성하기 위해 보낸 원세가 원나라가 북천하여 일하지 않고 있었는데, 공민왕이 그를 불러 공사를 맡긴 것이다. 그런데 1370년 6월 신돈과 이춘부가 공사 중지를 재차 요구하자 그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왕륜사 영전을 다시 수리하게 했다. 그렇게 왕륜사 영전 공사 재개로부터 3개월 뒤 9월에 왕은 또다시 영전이 좁다고 철거하고 다시 짓게 했다. 이후 마암 영전 공사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마암 영전의 구체적인 규모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단편적으로 전하는 기록을 보면 마암 영전에는 관음전이 있었고 기둥이 아홉 개이며 규모가 매우 높고 넓었다고 한다. 또한 관음전 3층에 상량하다가 26명이 압사하고, 그 때문에 명덕태후 홍씨가 공사 중지를 요청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왕륜사 영전을 다시 조성한 이후 관음전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다만 공민왕이 1372년 2월 관음전 구조가 낮고 협애하다 하여 다시 고쳐 지으라고 한 것을 보아 규모는 마암 영전 못지 않았던 모양이다. 관음전 이외의 영전에는 정문과 종루, 튼튼한 담장도 있었는데 공민왕은 담장을 만들 때 보병을 인솔하여 영전에 담을 쌓고 그 견고 여부를 송곳을 가지고 시험하게 했다. 화려한 영전의 취두 망새[* 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도 있었다. 정문은 5월에 철거를 명령하고, 종루는 7월에 고쳐 지으라고 명령했다. 1374년 6월 폭우로 인해 영전에 빗물 샌 곳이 생기자 왕이 크게 노해 동역관인 찬성사 한방신과 평리 노진을 옥에 가두고 곤장을 치기도 했다. 그 때 공사가 장기간 지속되어 노동력과 비용이 공급되지 않고, 역부들 중 죽은 자가 길에 연했지만 재상들과 간관들은 감히 왕에게 고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공사는 완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직후에 영전을 둘러본 공민왕은 시해당하기 바로 전날 같은 해 9월 계미일에도 왕륜사 영전에 갔다올 정도의 애착을 보였다. 하지만 완공을 보기도 전에 왕은 시해당하는 실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기록을 보면 처음 왕륜사에 영전을 지을 때부터 공사를 매우 급하게 독려해 도망가는 이들이 속출했다. 백성들의 불만은 마암 영전공사를 하면서 심해졌는데, 그들은 가뭄도 영전 공사 탓이라고 돌릴 정도로 중단을 원했지만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전을 조성하는 데 공로를 세웠다고 하여 나홍유를 승진시키고, 환관 김사행에게 상을 내려주었다. 가뭄이라도 비만 오면 공사에 지장이 있다고 하여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했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보나마나였다. 그렇다고 영전 공사를 신하들이 제대로 말렸냐면 그건 아니었다. [[명덕태후]]는 무시하는 걸로 끝났지만 '정지'를 요청한 유모를 쫓아내고 스스로는 말도 꺼내지 않은 정비를 집에 돌려보는 등 관련자들을 모두 처벌했다. 특히 시중으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공사 중지를 간언한 유탁의 경우에는 하옥시켰다가 죽이려고 했다. 이색이 죽기를 각오하고 유탁의 무죄를 주장해 신돈까지 끌고 들어와 변명을 한 다음에야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고 공민왕은 1371년 신돈을 처단한 직후 유탁도 신돈파라며 명덕태후가 극구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형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저지른다. 이 때 공민왕은 >"오랫동안 수상으로 있으면서 불의한 짓을 많이 하여 하늘이 큰 가뭄을 내리게 한 것이 첫째이고, 절의 토지를 빼앗은 것이 둘째이며, 공주가 죽었을 때 3일 간 제사를 하지 않은 것이 셋째이며, 그 장례에서 격을 낮추어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예에 준한 것이 넷째이니, 이보다 더 불충불의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하였다. 유탁의 죽음에 대해 공민왕은 다른 이유를 들었지만 공사 중지 논의 때문이라고 여겼다. 정작 영전 공사를 기점으로 세력화가 되어가던 신진사대부들은 이에 대한 간언을 올린 적이 없다. [[정도전]]이 [[공양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공민왕이 일으킨 운암사와 영전 공사가 매우 화려하고 국력의 손실이 커서 백성들의 원망과 비난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진언하지는 않았다. 1366년에 이미 [[신돈]]을 쫓아낼 것을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리는가 하면 왕의 면전에서 대놓고 신돈에게 일갈까지 날린 25세의 이존오의 행위와 비교하면 참으로 대조적인 처세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신돈이 [[평양]] 천도를 권했지만 영전공사 때문에 귀담아듣지 않자 다시는 권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공민왕의 의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민왕은 정치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공주가 죽은 뒤에도 [[신돈]]을 등용해 개혁을 펼치는가 하면, 북방 정세의 변화를 바탕으로 [[명나라]]와 교류했으며 그 틈을 파고 들어 요동의 동녕부 정벌에 나서는 등 영토 수복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나아가 1371년 다시 <개혁 교서>를 반포하여 개혁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왕이 미친 사람처럼 변한다는 여러 기록이 나온다. 물론 이 기록은 조선 건국 세력이 공민왕의 행동을 다소 곡해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한편 공민왕의 비극적인 최후는 공주에 집착해 백성들의 원성을 외면한 공민왕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으나, 말리지 못한 신하들과 말리기는커녕 방임만 하고 있었던 신진사대부들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잘못되었다고 훗날 비판했으나 당시에는 일절 간언을 올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능은 [[현정릉|정릉]](正陵)으로, '''고려시대 왕과 왕비를 합장한 유일한 쌍릉 형식이다'''. 공민왕의 능은 옆에 있는 '[[현릉]]'(玄陵)으로, 보통 '[[공민왕릉]]' 혹은 '[[현정릉]]'(玄正陵) 식으로 둘을 합쳐 부른다. 여기에는 두 능 사이를 잇는 조그만 구멍이 있는데, 이는 '영혼의 통로'라고 하며, 무덤 공사도 왕이 직접 주관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