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국대장공주 (문단 편집) === 임신과 죽음 === 《[[고려사]]》에 따르면 공주를 시중들던 [[몽골인]] 내관 팔사불화가 [[최안도]]의 아들 최원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을 보고 [[유산(의학)|유산]]을 겪은 적이 있는데[* 《고려사》 <폐행 열전> -최안도- 편 참고. 팔사불화가 "최원이 나를 때린 걸 보고 공주가 놀라 유산했다"고 공민왕에게 일러바치자 분노한 왕이 최원을 국문 끝에 좌천시켰다.], 이후 오랫동안 [[임신]]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364년 드디어 아이를 가졌지만 다음해(1365) 음력 2월 16일 [[난산]][[산모사망|으로 인해 승하하는 비운을 맞았다]]. 공민왕이 얼마나 절실하게 순산을 바랬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 사형수를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을 [[사면]]하고, 공주가 위독해지자 산천과 사찰에 기원을 드리도록 했으며[* 조선시대에도 역시 왕이나 왕비가 위독하면 종묘•사직이나 명산•대천 등 여러 곳에 기도를 드리곤 했다.] 나중에는 [[사형수]]까지 모두 사면해주었을 정도였다.[* 사실 왕실에 경사가 있으면 범죄자들에게 사면을 내리는 일은 흔했다. 다만 이 부분은 정말 공주를 아끼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보통 사면령을 내려도 사형수를 사면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면까지는 아니어도 사형집행을 미루는 일은 잦았다. 그 당시에 아기가 태어날 때 사람을 죽이면 그 원혼이 아기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주는 승하했고, 태중에 있던 아이까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후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 생전에 들인 혜비 이씨(1359년)를 빼고 익비 한씨(1366년), [[정비 안씨]](1366년), 신비 염씨(1371년) 등을 대부분 후계자 문제 때문에 들였지만 이들도 그다지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중 혜비 이씨는 공민왕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보내다가 결국 공민왕 사후에는 출궁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그나마 '''[[반야(고려)|반야]]'''가 유일한 소생이었던 [[우왕]]을 낳을 수 있었던 이유마저, '''그녀가 노국대장공주와 외모가 닮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다만 최근에는 왕후로 추존된 궁녀 한씨 소생이라는 말이 많다.] 금슬에 비해 아이가 없었다는 것을 보아 상당한 [[난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후에 공주가 난산으로 죽었다는 점, 공주 사후에 공민왕이 반야에게서 우왕을 본 것을 보면 공민왕보다는 노국공주 쪽이 난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