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국대장공주 (문단 편집) === 고려의 왕후로 살다 === ||[youtube(SjiFD0fJW3U)]||[youtube(vbPlvOy34mw)]||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의 왕녀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개혁정치나 반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야말로 공민왕의 정치적 동반자나 다름없었으며, 따라서 후대까지 백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흥왕사의 변]] 때는 공민왕이 숨은 방 앞에 앉아 반란군을 가로막은 걸로 유명할 정도이다. 비록 원나라 내에서 세력이 미약했어도 엄연한 원나라의 공주 신분이었기에 원나라를 등에 업고 있던 부원배와 反 공민왕 세력들은 서열상 자신들보다 높고, 명분과 권위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전면에 나섰을 때 반발조차 할 수 없었다. 정작 노국공주 본인은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았지만, 앞서 말한 그녀의 입지 때문에 그 존재만으로도 공민왕의 든든한 정치적 뒷배경이 되어 주었고, 본인도 이런 자신의 입장을 남편의 개혁정책을 위해 적극 이용하였다. 이러한 공주의 역할은 공민왕은 물론 고려 신하들도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원나라를 철저히 [[오랑캐]] 취급했던 조선 왕조의 개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조차 고려의 완전한 독립과 개혁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지지했던 그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고로 조선 [[종묘]]에 있는 공민왕의 사당에는 몽골 여인이었던 노국대장공주가 같이 합사되어 있기도 하다. 만약 노국대장공주가 모른 척했거나, 그때의 유력 권문세가들의 손을 들어줬다면 진작에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책은 브레이크가 심하게 걸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국대장공주가 공민왕의 손을 들어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방패막이가 되어줬기 때문에, 공민왕에게 정치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의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또 조선시대 《[[동문선]]》의 기록에 따르면 공주는 고려가 어려울 때는 몸 바쳐 도와주면서도 다른 공주들처럼 권력을 행사하거나 사소한 청탁 등은 일체 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고려의 신하들과 온갖 시련으로 고달팠던 백성들이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내조 덕분에 '''노국대장공주를 향한 공민왕의 사랑은 그야말로 유일무이해서 다른 여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둘이서 알콩달콩 잘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금슬에 비해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기에, 1359년 '''결혼 10년 만에'''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중신이었던 [[이제현]]의 딸 이씨를 비로 들였는데, 그녀가 바로 혜비 이씨이다. 사실 이것도 공민왕은 들이기 정말 꺼렸지만, 신료들은 물론 어머니인 [[명덕태후]] 홍씨가 간청을 하는 지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후궁을 들일 때는 노국대장공주의 허락까지 맡고 들였지만, 들이고 나서는 노국대장공주가 투기로 인해 식음을 전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사건 때문에 환관들과 여관들이 100가지로 참소했기 때문에 투기하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정작 공민왕은 후사 문제로 인해 혜비 이씨를 들였음에도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했는데, 노국대장공주만 바라본 탓으로 보인다. 당연히 신하들은 더 들이라고 요구했지만 공민왕은 공주가 승하하기 전까지는 더 이상의 여자를 들이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