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가쿠 (문단 편집) === 역사 === 노의 시작은 8세기경 나라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된, 현대의 [[서커스]]와 유사한 산가쿠(散楽)에서 유래한다. 散이란 원래 '쓸데없다', 또는 '잡다하다'의 뜻으로 높은 품격을 중시하는 궁중이나 [[신사(신토)|신사]]에서 우아하게 행하는 [[https://youtu.be/5OA8HFUNfIk|아악]][[가가쿠|(雅楽)]]에 비하여 천하고 대중적인 잡기라는 의미이다. 산가쿠는 11세기 헤이안 말기부터 가무나 흉내, 묘기 등의 익살스러움이 가미된 사루가쿠(猿楽)로 발전했다. 사루가쿠는 지역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는 형태로 발달했는데, 그 중 가장 융성했던 형태는 야마토사루가쿠(大和猿楽)라는 형태의 사루가쿠였다. 야마토사루가쿠는 네 곳의 야마토자(大和座)라는 극단[* 현재의 코츠즈미, 오오츠즈미의 오오쿠라류(大倉流)와 쿄겐의 오오쿠라류(大蔵流)의 원형이 된 오오쿠라자(大蔵座)라는 다섯 번째 야마토자가 원래 있었지만, 칸아미 시절에는 이미 없어져 있었다. 현재는 [[미야기현]]의 지역 공연에서 사루가쿠 오오쿠라자의 예풍이 계승되고 있다.]이 공연하고 있었는데, 이 사루가쿠의 가무적인 측면을 유우자키자(結崎座) 극단 소속의 칸아미(観阿弥)와 제아미(世阿弥) 부자(父子)가 익살스러움이나 유흥적인 요소를 빼고, 보다 세련되고 깊이 있게 다듬어 예술적 수준을 높여 완성시킨 것이 오늘날의 노이다. 이때 사루가쿠에서 분리된 익살스러운 요소들은 아래에서 설명할 "쿄겐"으로 분리되어, 현재까지도 노가쿠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참고로 칸아미와 제아미 부자의 유우자키자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현재는 칸아미와 제아미의 이름 앞글자를 따 칸제류(観世流)라고 불린다. 이후 나머지 세 곳의 야마토자도 칸제 부자를 따라 노가쿠로 종목을 변경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칸아미는 천재 희극 배우로, 애 딸린 아저씨였음에도 위엄 있는 장수의 연기부터 갸냘픈 소녀의 연기까지 자유자재로 완벽하게 해내는 인물이었다. 그 아들 제아미는 굉장한 미소년이었다고 전해지며, 천재 극작가이자 연극 이론가였다. 실제로 제아미는 세계 최초의 연극 이론 책인 『[[https://www.yes24.com/Product/Goods/75445162|풍자화전(風姿花伝)]]』을 집필했으며, 현재 남아 있는 노 작품 중 대다수는 제아미가 혼자 쓴 것들이다. 그 외에도 도아미(道阿弥), 조아미(増阿弥) 등이 큰 기여를 하였는데, 도아미는 야마토사루가쿠가 아닌 오오미사루가쿠(近江猿楽) 극단 출신으로, 노가쿠의 핵심으로 꼽히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인 유현(幽玄)의 미를 정립해 제아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조아미는 조온나(増女), 후시키조(節木増) 등의 아름다운 노멘을 조각해낸 조각가이자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제아미에게도 실력으로 인정받을 만큼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였다. 칸아미와 제아미 부자는 당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로부터 절대적인 후원을 받으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공연을 하는 어린 제아미를 보고 '''[[쇼타콘|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히익 페도]]--] 노를 발전시켰다. 후대 쇼군 요시모치(義持)는 제아미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제아미는 이미 쌓아놓은 인맥을 활용, 상류층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그들의 후원을 받아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대 요시노리(義教) 시대에는 오히려 박해를 받아, 제아미는 [[사도 섬]]으로 유배를 갔다가 요시노리가 죽은 후에야 교토로 돌아와 2년 후에 생을 마감했다. 중세 말 [[오닌의 난]](応仁の乱)을 계기로 중앙 정부의 권위가 실추되어 상류층 위주였던 노의 흥행 반경이 지방으로 확장되어 넓어졌고, 16세기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에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에 노는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았다. [[오다 노부나가]] 일가[*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는 노가쿠 덕후(...)가 되어, 마치 현대의 오타쿠들이 굿즈를 모으듯이 노 관련 수집품을 잔뜩 모으다가 아버지에게 몰수당한 적도 있었다.]는 노의 예술성에 주목해, 노를 귀족의 공식 예술로 인정하고 노를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시]]는 제아미의 후원자 아시카가 요시미츠에 비견될 만한 존재로 중세 말 노의 흐름에 새로운 활력소를 부여했고, 배우들을 자주 초청하여 공연을 즐기고 심지어 직접 콘파루류(金春流)에 입문해 노를 배우기도 할 정도로 각별한 노의 애호가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등 당대의 쟁쟁한 무사들이 직접 배우가 되어 무대에 오른 일화도 있다.] 히데요시는 직접 자신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극을 여러 편 집필하기도 했고, 또한 배우들에게 영지를 내려서 생활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한 이후에도 히데요시의 정책들은 대부분 그대로 시행되었기에 노는 계속 발전하였다. 이런 정책들이 배경이 되어 노가쿠는 사무라이 이상의 계급 전용 예술이 되어, 노가쿠 종사자들은 대를 이어 사무라이/다이묘 가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녹봉을 받아 생활하는 방식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2의 전성기 속에서도 새로운 노의 창작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 제아미 이후의 노 관련 종사자들은 기존 작품들을 정해진 연기의 틀 속에서 법식을 벗어나지 않고 얼마나 잘 연기해 내느냐에 승부를 걸었기 때문이다. 노를 관람하다 보면 등장인물들의 모든 언행과 동작이 느리고 절제되어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선대 배우의 몸짓과 언행 하나하나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따라하기 위해 속도가 느려졌다고 한다. 이는 서민들에게 주로 어필했고, 신기술과 새로운 창작 극을 계속해서 발전시킨 [[가부키]]나 [[조루리]]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결국 시간이 지나며 노는 사람들에게 따분하고 판에 박힌 공연으로 각인되었고, 실제로 일본에서 노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한 번도 관람한 적이 없다는 반응이 반, 관람을 했고 신기하긴 한데 너무 지루해서 5분 만에 잠들었다는 반응이 반이다. 에도 막부가 몰락하고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이후로는 노가쿠의 부흥을 이끈 이 지나치게 고전적인 레퍼토리와 막부 체제에 완벽히 적응되어 있는 생활이 오히려 독이 되어 노가쿠 자체의 존망을 위태롭게 했는데, 에도 후반 개항하면서 들어오기 시작한 서구의 선진 문물이 메이지 유신 후에는 사회를 통째로 뒤흔들 정도로 쏟아져 들어와, 전통 예술인 노가쿠와 가부키 등이 설 자리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서민의 예술을 표방하던 [[가부키]]는 발빠르게 새로운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진화를 거듭하면서 현대 연극과 견주어도 꿀릴 게 없는 수준으로 급성장했지만[* 이렇게 받아들였음에도 가부키 역시 신파극(新派劇)에 밀려 큰 위기에 봉착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메이지 천황이 직접 가부키를 관람하고부터는 격조 자체가 높아져 간신히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현대에도 가부키를 보다 졸았다, 재미없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니 가부키의 고충 또한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모든 변화를 거부하고 무로마치 시대의 연출과 레퍼토리, 그리고 생활 방식까지 그대로 고집한 노가쿠는 이 과정에서 도태하게 되었다. 에도 막부의 몰락으로 막부제가 철폐된 뒤에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쇼군가를 섬기는 것을 고집하다가 경제적 제도적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 것. 게다가 모든 힘을 잃은 구 귀족들을 대신해 버팀목이 되어줄 만한 서민들은 그 당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신파극]](新派劇), 많이 양보해도 변화를 모색하는 가부키에나 관심을 가질 뿐, 알아듣기 힘든 고어 대사를 사용하고 분위기도 지루한 노가쿠는 외면되고 만다. 결국 이 과정에서 유파 수곳이 없어져버렸고, 가장 역사가 깊은 유파로 알려졌던 콘파루류(金春流)는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다가 수백 년 동안 가보로 내려오던 노멘과 무대 의상을 비롯한 유물들을 외부에 팔아 생계를 근근히 이어나가야 할 정도로 몰락했다. 다행히 콘파루류에서 이 유물들을 산 부호들 대부분은 노가쿠 애호가들이었기에 구매한 유물 상당수를 콘파루류 측에서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콘파루류 자체의 규모도 엄청나게 쪼그라들어, 현재까지도 콘파루류는 당시의 상황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실제로 아무 노가쿠도(能楽堂)나 1년치 공연일정을 전부 찾아봐도 콘파루류의 공연은 1년에 한번 할까 말까 할 정도로 줄어들어 버렸다. 한편 메이지 유신을 기해 급진 개혁을 시도한 배우들이 뜻을 모아 우메와카류(梅若流)가 설립되기도 했지만, 지나치게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탓에 다른 노가쿠 종사자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해 없어져 결국 [[흑역사]]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바야흐로 노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새로운 극을 만들고 노가쿠 종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노를 홍보하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1996년에 창설된 노가쿠 종사자 5인으로 이루어진 그룹 "카미아소비(神遊)"[* 2016년 20주년 공연을 마치고 해산.]가 있었으며, 카미아소비의 멤버이기도 했던 칸제 요시마사(観世喜正) 같은 배우들은 외국에서 [[몰트 위스키]]의 탄생을 기념하는 노 공연을 하기도 하는 등, 퓨전 노가쿠와 어린이층 홍보를 적극적으로 한다. 심지어는 [[영어]]로 된 노도 여러 편 존재한다. [[남북전쟁]]이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있다. 현재는 공연은 물론, 후진 양성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과거처럼 대를 이어 종사하는 전문 배우 외에도 국립노가쿠도(国立能楽堂)나 여러 개인 전문가들의 교습을 통해 프로, 아마추어 배우들도 양성되고 있어, 과거의 아는 사람만 아는 예술에서 누구나 교양이나 취미로서 배우고 관람할 수 있는 예술이 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