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스토리우스파 (문단 편집) === 페르시아 === 정통파 신학을 거부한 네스토리우스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로마 제국]] 안에서는 거의 절멸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로마 제국 내부에서 쫓겨나 동방으로 이주했고 페르시아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그리스도인들은 1~2세기에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에 공동체를 형성했고,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점차 많은 이들이 파르티아의 영역으로 이주하여 교회를 형성했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 성 토마스와 성 아다이, 성 마리가 그리스도교를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샤푸르 1세]]가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무찌르고 7만에 달하는 로마군 포로와 시리아, 로마령 메소포타미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를 유린하며 잡아온 로마 시민들을 메소포타미아와 중앙아시아의 국경으로 보내 도시를 개발하고 살게 했기 때문에[* 실제로 이란에 가면 로마군 포로들이 지은 로마식 건축물과 다리를 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샤푸르 1세의 강제 이주는 그리스도교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권이던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진출하게 만들었다.] 페르시아령 메소포타미아(아수리수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파르티아와 그 뒤를 이은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들에게 특별히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나, 바흐람 1세와 바흐람 2세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소수 종교를 억압하던 270년대에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한 차례의 박해를 가하고 샤푸르 2세의 치세부터 본격적으로 박해를 하기 시작했다. 샤푸르 2세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 이후에 [[샤푸르 2세]]에게 페르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해달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사산 왕조]]의 왕중왕(샤한샤) 샤푸르 2세는 이 편지를 받은 뒤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로마의 간첩으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은 그 의심을 부채질했다.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이 왕중왕에게 그리스도교 박해를 부추긴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은 전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조로아스터교의 예배를 비웃고 사원을 모독한 것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었고, 페르시아 제국에서 이교도들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조로아스터교 사이의 교리적 차이도 그리스도교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행을 긍정하지만 조로아스터교 입장에서 고행은 미치광이나 할 법한 [[뻘짓]]이며, 그리스도교의 사제들은 [[독신주의]]를 고수했지만 조로아스터교 입장에서 독신주의는 세상 말아먹을 짓이었다. 왜냐하면 조로아스터교에게 현세는 곧 천국이 될 땅이었으며 선의 전사들을 계속 늘려서 악에게 저항해야 현세가 지옥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로아스터교는 다산을 장려하고 인구를 부양하는 농업을 중시했으며 신자들에게 근면하게 일할 것과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독신주의와 고행을 긍정했으니 조로아스터교 입장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은 왕중왕에게 그리스도교의 고행과 독신주의가 제국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진언했다. 샤푸르 2세는 318년부터 박해를 시작해서 339년부터는 이전보다 더 크게 박해했다(339 ~ 379) 샤푸르 2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군역을 면제하는 대신, 세금을 2배로 내라는 칙령을 내리고 [[조로아스터교]]로의 개종을 강요했다. 제국의 중심지 중 하나인 수사에서 시작한 박해는 2주 이상의 학살로 이어지고 다른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어떤 교회 사가는 죽은 이들 중에 이름이 알려진 신자만 1만 6천 명이었다고 하니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학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샤푸르 2세의 박해가 끝난 뒤부터 교회는 잠시 안정을 되찾았지만, 바흐람 5세가 즉위하자 다시 박해를 받았다. 살갗을 벗긴다든지, 몸을 묶은 뒤에 쥐가 들끓는 구덩이에 던지거나 신체를 절단해 죽이는 일들이 벌어졌고 바흐람 5세 이후에 즉위한 야즈데게르드 2세는 446년 카르카에서 [[주교]] 10명과 신자 15만 3천 명이 학살하는 최악의 박해를 저질렀다.[* 411년에 주교 36명이 모인 회의가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교회를 구성하는 핵심 인사들의 상당수가 처형당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중동의 역사. 문명 탄생의 요람(스테판 버크) 그리고 15만 명은 안티오키아나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거대 도시의 인구에 버금가는 숫자로, 어마어마한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죽어나갔다고 볼 수 있다. 출처: 비잔틴 제국의 역사. 워렌 트레드골드.] 지금도 현지의 교인들은 9월 25일에 모여 [[순교자]]들을 위해 그 날을 기념한다. 이렇게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그리스도교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살아남았다. 국교가 되면서 지배층 친화적으로 변해버린 조로아스터교의 인기가 떨어져서 하층민과 농민들이 그리스도교와 [[마니교]], [[마즈다크교]]에 기대었기 때문이었다.[* 사산조의 시대부터 조로아스터교는 국가와 결탁해 왕중왕과 귀족의 지배를 강화하고 사회적 모순을 정당화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상실해버렸다. 심지어 조로아스터의 최고 지도자인 모바단-모바드가 한탄할 정도로 페르시아 제국의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아닌 [[마니교]], [[마즈다크]], [[그리스도교]]가 대세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기 하락은 이슬람 침공 이후에 조로아스터의 세가 급격하게 떨어진 것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민중의 지지 덕분에 페르시아 교회는 왕중왕들의 박해와 조로아스터교의 공격을 잘 이겨낼 수가 있었으며 점점 그 규모를 키워 나갔다. 그리고 왕중왕들이 관용을 베풀 때에는 페르시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공개적인 활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관료로 일하거나 제국군에 입대하여 군인으로 복무하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호스로 2세의 로마 제국 원정 때 참가하여 거리낌없이 로마 제국을 공격하기도 했다. (샤푸르 2세의 군역세 납부 칙령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군 입대를 허용했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사족으로 페르시아의 시인 니자미가 쓴 '호스로와 시린'의 주인공인 시린은 호스로 2세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그리스도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 다만 시린은 합성론파([[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그리스도교도였고, 당시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도였던 재상과 다투었다.] 이렇게 갖은 고생을 하던 페르시아 교회 사람들이 굳이 로마 제국에서 이단 취급을 받던 네스토리우스파를 받아들인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페르시아 교회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영향과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안티오키아 학파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네스토리우스를 동정하고 그의 이론에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박해와 관용을 번갈아 하는 변덕스러운 페르시아 제국의 왕중왕들은 페르시아 교회의 그리스도교도들을 [[로마 제국]]의 간첩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로마에서 이단시하는 네스토리우스파를 받아들이는 것은 왕중왕의 박해를 피할 좋은 기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에페소 공의회]]로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된 후에 동로마 제국 황제 제논의 칙령으로 네스토리우스파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에데사의 페르시아 신학교가 문을 닫고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추방령이 내려지자, 로마 제국의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의 니시비스로 이주하여 니시비스 신학교를 열고 페르시아 교회 사람들과 연합했다. 그 결과가 497년의 셀레우키아-크테시폰 공의회로서 페르시아 교회는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서방 교회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페르시아 교회 입장에서는 로마 교회나 콘스탄티노플 교회나 전부 서방 교회에 해당했다.] 그리고 이 공의회 이후에도 페르시아 교회는 꾸준히 공의회와 시노드를 개최하여 독립 의지를 천명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으며 결과적으로 페르시아 교회는 서방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6세기에도 조로아스터교의 공격과 왕중왕들의 탄압이 이어졌지만,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과 니시비스, 군데샤푸르를 비롯한 대도시의 교구를 대주교구로 격상시키고 여러 도시에도 주교구를 설치할 만큼 교회의 규모가 커졌다.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 · 소코트라 섬 · 인도 · 페르시아 동부 지역에 선교 사업을 시작했는데, 아라비아 반도 동부의 라흠 왕국이 네스토리우스파로 개종할 정도로 성과가 상당했다. 이슬람 침공 직전에 이미 페르시아 제국의 절반 가량이 네스토리우스파로 추산될 수준이었고, 이러한 추세가 계속되었더라면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로마제국처럼 그리스도교 제국이 되었으리라고''' 예상하는 학자들이 있을 정도. 7세기에는 대규모 전염병과 동로마와의 전쟁으로 휘청거리던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이슬람 제국이 중동의 패권을 장악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이슬람의 중동 패권 장악을 환영했는데, 그 이유는 이슬람이 왕중왕들과 달리 자신들에게 박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며 다신교적 성격이 있는 조로아스터교 보다는 철저한 일신교를 지향하는 이슬람이 더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네스토리우스파의 예상은 적중하여 이슬람은 네스토리우스파를 비롯한 중동의 그리스도교 세력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합성론파와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이전보다 더욱 번창했다. 단기간에 급속도로 팽창해서 그리스-로마의 학문과 행정 인력을 필요로 하던 이슬람 제국은 그리스도인들을 관료와 번역가로 채용해 행정 제도를 정비하고[*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의 전직 관료들을 채용했다.] 각종 서적의 번역을 지시했으며, 아바스 왕조 시절에는 아예 '지혜의 집'을 지어 그리스-로마의 학문 서적들을 번역하고 정리 · 보존했다. 이때 활약한 번역가가 바로 후나인 이븐 이샤크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누스의 의학 서적을 번역했으며 많은 아랍인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슬람 제국은 딤미 제도를 운용해 종교세인 지즈야만 내면 소수 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 제국 내에서 별다른 차별을 받지 않고 여러 분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 제국은 소수 종교인들의 종교 활동과 생활, 문화에 간섭하고[* 공개적인 종교 행사를 제한하고 공개적으로 돼지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말을 타고 가더라도 이슬람 교도를 보면 말에서 내려야 한다거나, 옷에 소수 종교임을 알리는 표식을 달아야 하는 규정을 정하는 등 딤미에 대한 차별 규정이 많았다.] 소수 종교 출신 공무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차별을 가했다. 또한 지즈야는 하층민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어서 그리스도교나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하층민과 농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과 지즈야 납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계급 성분을 변화시켰다. 이슬람 제국의 농민은 토지세인 카라즈(Kharaj)[* 또는 하라즈. [[아랍어]]의 KH 발음이 참 묘해서 일단 카라즈라고 번역.]와 수확세인 우쉬르(Ushr)[* 관개가 잘 된 토지, 비옥한 토지에만 따로 물리는 세금으로 대략 수확량의 10%를 거두었다.]를 납부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이면 종교세인 지즈야를 무조건 현물 대신 돈으로 내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과중했다. 이슬람 제국의 농민 입장에서 세금을 곡물 대신 화폐로 지불하게 되면 곡물을 내고 화폐를 구입해야 하는 수고가 생기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인 농민들은 지즈야를 감당하기 부담스러워져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도시로 이주해 도시민이 되었다. '''지즈야는 도회지에 사는 중산층과 부유층들에겐 그렇게까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농촌 주민에게는 화폐를 멀리서 구입해와야 하는 이유로 큰 부담으로 때문에 이슬람 제국이 세워진 뒤부터 그리스도인들의 계급 성분은 농민과 하층민의 비율이 대폭 감소하고 도시민, 중산층, 부유층의 비율이 크게 증가했다.''' 이슬람 지배하에서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전문직 · 기술자 · 행정가 · 의사 · 번역가로 종사했으며 착정(우물 파기) 기술자로 일하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의학 분야는 특히나 능통한 분야라서 네스토리우스파는 3세기에 설립한 군데샤푸르의 의학교를 계속 운영하고 의사들을 양성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상술한 후나인 이븐 이샤크와 가브리엘 바흐티시슈로 이들은 칼리프의 주치의 자리까지 지낸 당대 최고의 의사들이었다. 그리고 페르시아 만의 진주 채취업자 중에도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고, 그리스도인들은 무슬림들이 꺼리는 도축업이나 무두질, 3D 업종에 진출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그러한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바스 조가 우마이야 조를 무너뜨리고 바그다드로 천도하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총교단을 바그다드로 옮기고,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북으로는 카스피 해 서부 지역에 진출해서 주교구를 세우고[* 현지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신수를 베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남으로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 서로는 네스토리우스파에게 가장 적대적인 합성론파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까지 교회를 세웠다.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와 티벳을 거쳐 중국까지 진출했으며 일부 전승에 따르면 일본에도 전파했다고 한다. 총대주교가 있는 바그다드의 네스토리우스파 총교단은 비단길을 통해 먼 곳에 있는 교구들과 소통하며 연결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총교단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모든 교구는 총대주교에게 순명하고 주교 서품을 총대주교에게 요청했다. 소통도 원활해서 메소포타미아에서 번역하고 만든 서적이 1년이면 중앙아시아와 중국 서부에 도착했다.[* 투르판의 어떤 교회는 폰토스와 그리스 출신 교부들의 저작을 보유했다. 이것은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여서, 투르판과 중국의 불교 사원들은 인도의 승려들이 쓴 경전과 글들을 보유했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성경과 신학 서적, 각종 기도문의 현지어 번역을 실시해 신학에 대한 장벽을 낮추고, 각 교구의 신자들이 교리를 좀 더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성경 낭독을 하는 전통을 전파해서 교리의 변질과 왜곡을 막고 신자들이 교회와 일체감을 느끼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