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스토리우스파 (문단 편집) === 탄압과 쇠퇴 === 하지만 아바카 사후 그의 동생 테구테르는 어머니의 영향에도 불구, [[이슬람]]을 신봉하고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였고[* 이는 현지화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후 중동에서 네스토리우스교는 탄압의 나날을 겪게 된다. 특히 서구 [[교황]]과의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중동의 지배자인 [[몽골인]]들이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더이상 갖지 않게 되자 (또 이슬람에 관심을 갖게되자) 이는 대학살을 가져오게 된다. 1297년 이르빌에서 벌어진 대학살이 좋은 예로, 이는 시내의 [[쿠르드족]] [[무슬림]]이 [[교회]]를 파괴하자 그곳에 주둔하던 몽골계 병사가 무슬림을 활로 쏴죽인 것이 발단으로,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포위하고 이르빌의 대주교와 사제들은 붙잡아 살해했으며 수많은 신자들이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총대주교 야발라하가 1317년에 죽은 후 네스토리우스교는 최후의 보호막마저 잃어버리고 14세기 말까지 끝없는 쇠망과 추락의 연속의 역사를 겪고, 14세기 말 [[티무르]]의 서아시아 침공과 무차별적 주민 학살로 거의 끝장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유럽]]에서 시작된 [[흑사병]]이 [[중앙아시아]]까지 번진 바람에 중앙아시아 및 그 이동의 지역에서 네스토리우스파가 전멸하고 말았다. 즉, 네스토리우스교가 몰락한 근본적 원인은 지배층의 이슬람으로의 경도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서 보호장치가 사라져 버린 것이라 볼 수가 있으며, 그 시기에 [[흑사병]]이라는 치명타를 맞은 것 또한 네스토리우스파의 몰락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중반이 되면 동아시아와 몽골 초원에서도 사라졌다. [[청나라]] 시기에도 소수의 네스토리우스교 신자들이 존재했지만[* [[청나라]] 시대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후이족]]의 일부로 보아서 십자회회라고 불렀다.], 극소수에 불과할 정도였고, 약간의 탄압도 있었다보니 거의 없는 존재나 다름없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