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스토리우스파 (문단 편집) === [[신라]]와 [[발해]]로의 전파설 === > 발해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련의 고고학자 샵쿠노프(1930~2001)는 1960년에 [[우수리스크]] 근처 고려인 마을이었던 ‘차피고우’ 일대에서 발해 유적을 조사했다. 그가 선택한 발굴지는 아브리코스라고 불리는 언덕 위의 발해 절터였다. 끊임없이 나오는 기왓장 사이에서 자그마한 진흙 조각을 발견했다. 그냥 흙덩이로 착각할 만한 진흙 조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십자가였다. 그것도 보통 십자가가 아닌 끝으로 갈수록 벌어지는 특이한 형태였다. 바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발해로 유입된 그리스도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의 십자가였다. 흔히 ‘시리아식 십자가’라고도 하는, 끝이 넓어지는 십자가는 주로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네스토리우스교를 대표한다. 샵쿠노프의 놀라운 발견은 1968년에 발간된 그의 박사 논문을 통해서 처음 소련 학계에서 공개되었다. 하지만 냉전의 시대에 그의 발견은 널리 주목받지 못했다. 다만 최근 발해 유적에서 다양한 실크로드의 흔적이 확인되며 재조명받고 있다. > > [[경교]]가 당나라에서 탄압받던 시기에 한반도 일대에서는 발해와 통일신라가 번성하며 사방과 교역하던 시기였다. 당시 발해는 몽골의 위구르 제국,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상인들이 살면서 많은 교역활동을 하던 때였다. 경교를 믿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소그드인들이었다. 소그드 상인들은 발해에서도 활동했으니, 그들의 일파와 함께 경교가 흘러들어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 > 발해 아브리코스 유적은 불교 사원이고, 유물도 자그마한 진흙으로 만든 십자가에 불과하다. 이 십자가 말고도 중국 훈춘에서 경교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발해 시기의 불상 장식에서 십자가가 발견된 적도 있다. 그래도 경교의 흔적이라고 보기엔 많이 미약해 보인다. 그런데 당시 경교인들의 풍습을 보면 이런 상황은 이해된다. 경교인들은 수백년간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성상을 만들지 않았고, 자그마한 십자가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 토착화해서 유교와 불교의 풍습을 널리 받아들이면서 별도의 사원을 세우지 않고 불교나 유교 사원처럼 자신들의 사원을 꾸몄다. [[둔황]]이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장]]에서 발견된 경교 예수상도 불화의 한 장면에 십자가를 새겨넣은 것처럼 보인다. 경교인의 무덤에도 돌로 만든 십자가를 새겨넣었을 뿐이었다.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해뿐 아니라 통일신라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불국사 출토의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다. 하지만 불국사 출토품은 경교 십자가의 형태와 많이 다르며 경교 신도들은 성모상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논란이다. >---- > 발해 ‘십자가’ 유물은 개방과 공존의 상징이었다[[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24770.html|#]] 위 단락의 당나라로의 전파에 이어 한반도에도 네스토리우스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당시는 [[장보고]]와 [[신라방]]으로 알려져 있듯 [[황해]]를 넘나드는 한중 교역이 활발했는데 당나라와 신라의 밀접한 관계를 감안하면 당나라 조정의 지지를 오랫동안 받았던 경교가 한반도까지 넘어올 가능성도 있기 때문.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는 1956년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출토되었다는 석제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음상이 전시되기도 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경교 유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한반도 전래 시기를 [[천주교]]가 전래된 [[조선]]시대가 아니라 [[남북국시대]]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293|#]] 역사학계에서는 당장 위 유물 출토의 사실 여부부터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보아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로 현재 한국사 사료상 그리스도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 말 몽골에서 파견된 관리 [[활리길사]]([[게오르기우스]])이다. 물론 활리길사는 선교하러 온 것이 아니었고 행정 실무를 목적으로 파견되었던 사람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