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로/생애 (문단 편집) === 계속되는 폭주와 사촌형 살해 === 네로는 64년 자신의 연극 데뷔라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이후부터 부자와 상류층들에게 평가가 상당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네로는 이 무렵부터 예전과 달리 몸이 점점 비대해져 갔고, 완전히 자기절제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 그는 이때부터 자신을 내세우면서 유흥과 사치에 많은 돈을 쏟아 부었는데, 네로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했고 열혈한 그리스 문화 애호가답게 그리스에서 들어온 것을 사랑했다. 이때 네로가 없어서 못 살 정도로 소비한 사치품은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중 유명한 것은 [[장미]]였다. 따라서 네로 시대 동안 [[팔라티노 황궁]] 안에는 네로의 명에 따라 황제 개인 방에 늘 장미꽃잎이 뿌려져 있었고, 장미로 만든 향수를 뿌린 새가 방 안을 날아다녔다. 또 그는 장미향을 사랑해 향수도 남들보다 많이 썼다. 그리고 그는 아라비아나 근동에서 가져온 온갖 사치품들을 물쓰듯 소비했는데, 대부분의 사치품들은 로마나 제국 내 대도시들에서 한 해 소비하는 양과 거의 맞먹을 정도거나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조차 어려운 향신료 같은 물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네로의 이런 호화로운 생활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따라서 네로는 [[티겔리누스]]가 이끄는 조직들을 이용해 로마 내 부자들과 원로원 의원들을 대상으로 날조된 죄명을 덮어 씌워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를 비롯한 황실 사람들이 대거 숙청된 이후, 가까스로 살아남은 방계 황족들까지 반역죄를 덮어 씌워 즉결 처형한 뒤 재산을 빼앗았다. 그 결과, 선제 클라우디우스의 사위이자 독재관 [[술라]]의 후손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를 비롯해 티베리우스의 외증손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등이 네로에 의해 '인기가 많다',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때 이들의 자녀 및 손주들까지 네로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 그런데 이중 평소 자기 자신을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임을 대놓고 내세운 데키무스 실라누스 내외 외에는 모두 뚜렷한 죄목도 없어서, 네로의 행동은 정치적인 이유도 전혀 없는 범죄 그 자체였다. 또 네로의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과거 칼리굴라의 반대파 숙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했고, [[연좌죄]] 등을 대놓고 활용했다. 그래서 로마의 여러 전통들을 황제 스스로 깨버린 행동들이라고 당대사람들에게 씹힐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친족 숙청 중 58년 벌어진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추방 및 처형 사건은 누가 보더라도 악질적이었다. 그래서 네로가 파우스투스 술라를 58년 반역죄로 기소할 당시부터 문제가 많았다. 고대기록상 네로는 확실히 사촌형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를 두려워했고 그가 비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그의 직계조상 [[술라]]처럼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네로의 증오심과 질투처럼 비열한 악인은 아니었다. 네로가 그를 미워한 이유는 먼저 이 사람이 아우구스투스 후손이라는 점[* 네로의 고모가 낳은 아들이므로 네로와는 혈연적으로 사촌형이기도 했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생전 브리타니쿠스의 보호자로 낙점될 뻔한 점[* 클라우디우스의 맏사위인데다, 혈연상 브리타니쿠스의 외삼촌이었다.], 마지막으로 네로가 연정을 품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남편인데다 인기 많고 기품 있는 황족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네로는 이런 사촌형을 진짜 미워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파우스투스가 나이에 비해 회백색 머리인 것을 가진 점을 비난하면서 "숱이 없는 대머리"라고 지속적으로 놀렸고, 일찍부터 사람을 붙여 뒤를 캤다. 하지만 펠릭스는 본래부터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었고, 황실 일원임에도 정치적 음모와는 전혀 연루되지 않았기 때문에 꼬투리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네로는 사촌형을 진짜 두려워 했고 죽이고 싶어했기 때문에, "분명히 음모를 꾸몄을 것"이라고 판단해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티겔리누스에게 명을 내려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제거하려고 조작된 사건을 터트렸다. 그 결과 네로는 서기 55년 이전의 근위대장 부루스가 자유민 팔라스와 공모해, "파우스투스 술라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다"고 재판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파우스투스는 애당초 팔라스, 죽은 부루스 같은 인사들과 거리도 멀었고, 목적 자체도 클라우디우스 시절 고위관료를 지냈고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최측근이기도 한 팔라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에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를 엮어버린 탓에 재판 방향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따라서 재판 진행 내내 팔라스와 파우스투스를 엮으려고 한 시도는 실패했고, 팔라스와 파우스투스를 모두 엮어 제거하려는 계획도 실패했다. 이렇게 티겔리누스를 앞세워 파우스투스를 기소했던 것은 성공했지만, 네로의 파우스투스 제거 계획은 끝내 실패했다. 하지만 네로와 타겔리누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3년 뒤 다른 자유민을 반란 혐의로 기소하면서 파우스투스 술라를 58년 의도적인 조작을 통해 어거지로 재기소했다. 그러나 이때도 파우스투스를 바로 죽이기 못했다. 왜냐하면 자유민의 입을 통해 "펠릭스가 네로를 공격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했어도, 타키투스가 지적했듯 이 사건은 실체도 없었고 그 자유민은 증거 없는 거짓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이 재판은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의 무죄가 증명될 정도로 실체가 명확했다고 한다. 따라서 59년 네로는 펠릭스를 갈리아의 마실리아(오늘날 [[프랑스]] [[마르세유]])의 감옥에 보내는 것에서 끝내야 했다.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가 억울하게 유배된 이유는, 네로가 재판에서 "펠릭스가 그랬을 것"라는 자의적 해석과 어거지로 유죄를 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로는 이정도 선에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3여년 뒤인 62년, 아주 비열하고 은밀한 명령을 내려, 감옥에 있는 사촌형을 암살하고 그 증거로 그의 머리를 로마로 가져오라고 했다. 명령을 하달받은 티겔리누스는 명을 받은 뒤 불과 5일 만에 갈리아의 감옥으로 갔고, 저녁식사 자리에 있던 파우스투스 술라를 죽였다.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파우스투스 술라 사건은 애당초 목적 자체가 매우 불순한 사건인 탓에, 후에 벌어질 피소 음모 사건처럼 그 전말이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네로는 막장군주들이나 할 만한 일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동안 여러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한데다 피소 사건 이전에 처형이기도 했던 파우스투스의 아내를 노리고 실제 근친상간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리 내 소문을 통해서만 여동생과 근친상간 소문이 돈 칼리굴라와 달리, 네로는 당대부터 이 문제를 지적받기도 했다. 이 내용은 [[타키투스]]의 기록에 나오는데, [[수에토니우스]]와 달리 원로원 회의록과 관보를 토대로 최대한 사실에 입각해 기록한 그의 스타일과 [[플라비우스 왕조]]와 이 왕조 이전과 가장 가까운 네로 시대에 대한 그의 정확한 기록 특성상 이는 사실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근친혼이 빈번한 로마 귀족들과 원로원에서도 파우스투스 술라의 추방과 처형, 이후 벌어질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처형사건은 다소 쇼킹할 일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를 네로 한명으로 바꾼 사건이었기 때문에, 본인 입장에선 스스로의 정통성을 끌어올린 사건이기도 했지만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네로 몰락의 시발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류층이나 로마 지식인들 사이에서 해당된 일이었을 뿐이었고, 아직까지는 민중들에게 이런 막장행동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하류층들의 네로에 대한 반감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