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로 (문단 편집) == 개요 ==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 매장지는 본가인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집안의 공동묘지[* 도미티이 아헤노바르비 마우솔레움]이다. 외종조부 [[클라우디우스(로마 4대)|클라우디우스]]의 둘째 사위가 된 뒤 양자로 입적되면서 오늘날 익히 알려진 풀 네임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로 개명했다. 하지만 이 당시 클라우디우스와 황실 어른들은 아헤노바르부스라고 불렀고, 후계자가 되지 않았으며 본인 역시 제위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기 54년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자 어머니 아그리피나, [[세네카]]와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 주도의 친위 쿠데타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 후손[*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네로 탄핵 당시 원로원과 군대에서 일관되게 정의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직계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대드루수스, 게르마나쿠스와 클라우디우스, 브라타니쿠스’였다.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소드루수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등 아우구스투스 집안 남성들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4대 황재 클라우디우스의 가계를 기준으로 언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외동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황제로 즉위했다. 즉위 당시와 처음 5년간의 기간은 황금기라고 불랄 만큼 평도 좋았고 활달하고 발랄한 성격, 총명함과 유머 감각으로 등장 당시부터 황제 개인의 인기가 상당했다. 이때 스승 [[세네카]][* 세네카가 유능한 사람인 건 사실이지만 네로를 통제할 수 없는 군주로 만드는 데 책임이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네로의 스승인 세네카는 소아그리피나파와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10대 사춘기였던 네로에게 프린켑스로서 네로가 돋보여야 된다고 조언하는 과정에서 취미 활동인 전차 경기 몰두와 음악 활동을 장려하고 헬레니즘 군주와 같은 행동도 하도록 조언해 결과적으로 네로를 통제하기 힘든 황제로 만들고 말았다.]를 중용해[* 네로와 달리 이전 황제들인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는 세네카를 신뢰할 수 없는 자로 여겨 그를 견제했고, 죽이거나 완전히 추방시킬 생각도 했다. 실제로 세네카는 로마로 복귀한 이후, 신임 근위대장이 된 브루스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친구가 되었고, 서서히 힘을 키워나가면서 어린 네로의 스승이 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고 [[코르불로]]를 기용하여 [[파르티아]] 전선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그는 즉위 초부터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을 여럿 죽이고 방탕한 생활로 인해 상류층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로마인들이 중요히 여긴 가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 도덕성, 청렴함과 고결한 미덕 등과 워낙 상반된 행동을 대놓고 벌인 탓에 '''막장성과 정신병자 수준의 광기를 동시에 갖춘 인물'''로 낙인찍혔다. 따라서 사후 로마 제국의 폭군 [[콤모두스]], 광기의 대명사 [[엘라가발루스]]와 비교해 보면 비교적 업적이 있음에도, 의도적인 기독교도 탄압과 어머니, 아내 등을 비롯한 본인 외의 일가 직계 친족 살해, 선황이자 양부 클라우디우스 능욕, 심각한 사치와 난잡한 사생활 등의 종합적인 단점으로 오늘날까지도 '''동서고금 막론하고 [[폭군]]의 대표 주자'''로 꼽히고 있다. 네로에 대한 평가는 그가 십 년 넘게 제위를 지킨 기간 동안의 객관적인 행적상 폭군이라는 것에는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일부 업적이 주목을 받으며 재평가를 받은 까닭에 오늘날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따라서 그를 평가하는 의견 중에서는 “제정신 아닌 짓들을 많이 저지르기는 했으나 네로 본인은 크게 잔인하지도, 정국에 아예 관심이 없지도 않았다. 단지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예술가적 기질이 너무 강한 데다[* 어디까지나 '기질'이 강했을 뿐, '재능'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간혹 [[아돌프 히틀러]]와 비교되기도 한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히틀러는 당시 워낙 뛰어난 예술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을 뿐이지 히틀러 본인 역시 나름대로 예술로 먹고살 만한 재능은 있었다.] 몇 가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면서 반란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스스로 [[자살]]하는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고, “[[콤모두스]], [[포카스]] 등과 동일선상에 놓일 폭군은 아니더라도, 네로는 폭군이며 부적격자였다. 그가 저지른 실책은 [[칼리굴라]]보다 더 심각했다. 네로의 치세는 로마 제국에 분명히 악영향을 줬다. 그래서 그가 실각한 뒤, 내전에 접어들었다. 다행히 그 실책들은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그]] [[도미티아누스|아들들]]에 의해 정리됐다.”는 주장도 있다. 즉, 오늘날 [[재평가]]를 받으면서 네로는 과거처럼 무조건 폭군이라고 비난만 받고 있지는 않고, [[본인]]이 한 일에 비해 후대에는 악명이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며 동정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로마 대화재의 배후에 네로가 있었다는 루머는 거의 [[중상모략]]에 가까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그가 만든 황금 궁전, [[코르불로]] [[숙청]] 등의 연이은 행동은 분명 그의 몰락을 가져온 최대 실책이었고, [[군대]]의 신임까지 잃게 해 결국은 몰락의 결정타가 되고 말았다. 또 무리한 친족 살해와 스승 [[세네카]] 처형 등은 반대파들이 그를 실각시킬 당시 내건 명분 중 하나가 됐다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재평가를 하는 측 역시 이전까지의 황제들과 달리 진짜 악행을 수없이 저지른 네로를 동정할 뿐, '''"네로는 [[명군]]이었으나 억울하게 쫒겨나서 죽었다."'''[* 참고로 이렇게 '''될 뻔한''' 명군으로는 [[하드리아누스]]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즉, 네로는 분명히 [[폭군]]이자 [[암군]]으로서 여러모로 거대한 제국 로마의 통치자 노릇을 하기에는 부적격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저지른 악행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평가될 여지만 있을 뿐 폭군이라는 평가는 당연히 피할 수 없다. 네로를 재평가하는 측에서도 최대한 추켜세우는 정도가 "'''[[황제]]가 아니라''' 순전히 돈 많은 황족으로서 [[예술가]]나 [[전차]] 경기 선수로 살았으면, 탄핵당해 [[비명횡사]]하지도 않고, 원하던 대로 로마 시민들의 인기를 누리면서 충분히 사랑받고 천수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을 텐데 참 안타깝다." 정도에 불과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